‘그레이 리스트’ 메모와 스마트폰 주변에 흩어진 키보드 자판 — AI 자료 이미지
애플이 아이폰 키보드에 공개하지 않은 ‘그레이 리스트(gray list)’를 두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 목록에 오른 단어와 문구는 예측 텍스트(다음 단어 제안)와 스와이프 입력에서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연구자 데릭 카우프먼(Derik Kauffman)이 항목을 정리해 웹사이트에 공개했고, 로이터가 표본을 직접 시험해 보도했다.
규모는 집계 기준에 따라 수만 개에서 약 10만 개까지 엇갈린다. 애플은 목록 자체에 대해서는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입력은 되지만 키보드가 권하지 않는다
그레이 리스트는 iOS 키보드가 예측 텍스트와 스와이프 입력에서 특정 후보를 빼 버리는 목록이다. 아이폰으로 글을 쓰면 키보드 위쪽 제안 줄에 다음 단어나 입력 중인 단어의 완성형이 뜬다. 글자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쓰는 스와이프 입력도 같은 예측 엔진을 바탕으로 어떤 단어를 의도했는지 판단한다. 목록은 이 두 기능의 뒤편에서 일부 후보를 조용히 지운다.
이름에 ‘회색’이 붙은 이유는 막지는 않기 때문이다. 테크레이더(TechRadar)에 따르면 목록에 오른 표현도 메시지나 이메일에 직접 입력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다만 iOS가 자동완성으로 제안하지 않고, 스와이프로도 입력되지 않는다.
카우프먼이 문구를 공개한 사이트 ‘스와이프블록드(Swipeblocked)’는 동작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측 텍스트는 목록에 있는 문구를 뻔한 다음 단어일 때조차 제안하지 않는다. 스와이프 입력은 다른 단어를 고르는데 때로는 말이 안 되는 단어이며, 이미 입력한 단어를 바꿔 놓기도 한다. 기즈모도(Gizmodo)는 낱말을 하나씩 직접 입력하면 자동 수정이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카우프먼이 블랙리스트 대신 그레이 리스트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책상 앞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양손으로 조작하는 모습 — 이해를 돕는 AI 자료 이미지
스와이프가 버벅이는 이상한 문구에서 시작됐다
카우프먼이 조사를 시작한 계기는 스와이프 입력이었다. 기즈모도가 로이터 인터뷰를 인용해 전한 바로는 특정 문구에서 입력이 자꾸 끊기는 것을 알아챈 것이 출발점이다. 그는 오픈AI의 코덱스(Codex)와 앤트로픽의 클로드 코드를 함께 활용해 목록을 찾아냈다고 한다.
신뢰도를 높인 것은 공개 방식이다. 항목이 검색 가능한 형태로 올라오자 기자들이 표본을 골라 실제 기기에서 시험할 수 있었다. 로이터는 표본 단어를 입력하고 스와이프하며 결과를 확인한 뒤 수만 개 항목이 있다고 보도했다. 테크레이더는 독립 사이버보안 엔지니어 한 명이 이를 검증했다고 적었다.
규모를 둘러싼 숫자는 세 가지다. 수만 개라는 집계가 있고, 카우프먼은 중국어 문자를 뺀 단어·문구·변형을 합쳐 약 10만 개라는 보수적 추정치를 내놨다. 영어 카탈로그는 4,513개 항목이다. 한 분석은 언어와 변형이 늘수록 합계가 커지기 때문에 숫자 차이가 곧바로 모순은 아니라고 짚었다. 정확히 10만 개라고 확인된 바는 없고, 애플도 개수를 밝히지 않았다.
욕설·마약부터 정치·지정학 문구까지
목록의 상당수는 예상 가능한 표현이다. “son of a bitch” 같은 욕설과 비하 표현이 있고, “crystal” 뒤에 “meth”를, “smoking” 뒤에 “weed”를 붙여 제안하는 일도 없다. 마약·성적 표현·폭력적 문구가 들어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런 표현을 키보드가 먼저 권하지 않는 것은 납득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논란을 키운 것은 정치적 문구다. “dictator Trump”, “sleepy Joe”, “right wing conspiracy”가 목록에 올라 있다. 테크레이더는 “Tibetan independence”도 자동완성과 스와이프 입력이 되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가디언이 확인한 항목에는 “NSA spies”, “question your sexuality”, “Australia is a very bad place”가 있다.
“Kashmir dispute”와 “united Ireland”도 목록에 있는데, 애플이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것은 피한다고 비꼬는 시선이 나온다. 언어별 항목도 있다. 아랍어 “العدوان الإسرائيلي”(이스라엘의 침략), 히브리어 “השטחים الكبوشة”(점령지), 중국어 “台独”(대만 독립)가 예시로 제시됐다.
기준이 일관돼 보이지 않는 사례도 많다. “bad girl”은 빠졌지만 “bad boy”는 괜찮고, “black man”은 되지만 “white man”은 안 된다. “read smut”는 허용되는데 “read gay smut”는 목록에 올라 있다. 전체 이름이 들어간 사람은 한 명뿐인데 그 이름이 “Trayvon Martin”이라는 점도 지적됐다. “OS x”와 “iMessage isn’t working”도 있다.
일부 문구는 자동완성은 되지 않아도 스와이프로는 입력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make America great again”과 “Covid was a hoax”가 그런 예다.
애플의 답변은 원칙론, 전문가는 투명성을 주문
애플의 공식 반응은 제한적이다. 테크레이더에 따르면 애플은 이메일 답변에서 목록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폰 키보드가 부적절하거나 불쾌할 수 있는 제안을 내놓지 않도록 설계돼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애플은 특정 문구가 목록에 오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고, 사용자는 원하는 것을 입력하고 예측 제안을 무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의 시각은 조건부 이해에 가깝다. 전자프런티어재단의 데이비드 그린은 iOS 키보드에 그레이 리스트를 두는 발상은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사용자가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직접 맞춤 설정할 수 있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카우프먼도 애플이 무슨 일이 왜 벌어지는지 더 설명하길 바란다. 그는 “매우 가벼운 형태의 검열”이라면서 “하지만 애플이 운영하는 규모에서는 가벼운 손길만으로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테크레이더는 이전에 아이폰 음성 받아쓰기에서 “Trump”가 “racist”로 바뀐다는 논란이 있었다고 상기시켰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고 이 매체는 적었다. 어떤 기준으로 어떤 문구가 목록에 올랐는지는 애플이 밝히지 않아 외부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 영어 항목 4,513개는 기즈모도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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