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기업에 다니는 여성도 집 안에서는 남편의 발길질을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 중 하나가 "나도 잘한 건 없다"는 자책이었다.
S전자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 결혼생활 게시판에 '딸이 남편한테 맞았다고 하면'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남편한테 맞았는데 부모님께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며 "부모님으로서 기분이 어떨 것 같으냐"고 물었다.
가정폭력 피해를 겪은 여성이 집 안에서 홀로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을 연출한 AI 생성 사진
두 줄짜리 본문 뒤에 감춰진 사정이 글쓴이가 단 댓글로 하나씩 드러났다. 작성자는 "발로 차이고 뒤통수를 바닥으로 밀더라"고 했다. 처음도 아니었다. 그는 "화나서 내 목을 친다든가, 쌍욕을 한다든가, 내 위에서 내 입을 두 손으로 세게 막는다든가 하는 폭력적인 성향이 보이긴 했다"고 적었다. 이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고 그때 남편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더 심해졌다"고 했다. 아이는 없고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작성자는 자신의 피해를 줄여 말하는 듯 보인다. 진단서부터 끊으라는 댓글에는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모든 부부싸움이 그렇듯 나도 잘한 건 없다. 빨래 건조대를 바닥에 던졌다"고 했다. 다른 댓글에는 "심각하게 맞은 건 아니고 남편이 허벅지를 발로 찼다"고 적었다.
댓글이 곧바로 글쓴이 태도를 바로잡았다. 한 공무원은 "지금 판단력이 흐려진 것 같다"고 했다. 삼성SDS 직원은 "물건한테 화풀이한 거랑 사람 치는 거랑 같은 거냐. 손대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고 했다.
작성자처럼 폭력을 겪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스스로를 탓하는 피해자는 드물지 않다. 성평등가족부가 발표한 2025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에서 만 19세 이상 9077명 가운데 지난 1년간 배우자나 파트너에게 폭력을 당했다는 응답은 5.9%였다. 피해자의 68.5%는 폭력 당시 별다른 대응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답했다. 대응하지 않은 이유로는 '그 순간만 넘기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36.3%, '폭력이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34%, '창피하고 자존심 상해서'가 31.4%로 나타났다. 2022년 조사에서는 '내 잘못도 있다고 생각해서'라는 응답이 14.2%였다.
작성자가 부모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데는 더 깊은 사정도 있었다. 작성자는 "아빠도 폭력을 쓰셨는데 너무 아빠랑 비슷한 사람이랑 결혼한 것 같다"며 "부모님께 위로받고 싶은데 아빠도 별로 내 편이 아닐 것 같아서 말하기가 망설여진다"고 했다. 그는 다른 댓글에서 "아버지한테 얼토당토않은 이유로도 맞았었다"고 적기도 했다. 이혼할 것도 아니면서 왜 부모에게 말하느냐는 댓글에는 "말씀을 안 드리면 부모 입장에서 속이 얼마나 상할지, 말씀을 드리는 게 나은 건지 고민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가정폭력 피해를 겪은 여성이 집 안에서 홀로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을 연출한 AI 생성 사진
네티즌들은 폭력이 되풀이되고 더 심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찰이라고 밝힌 한 공무원은 "업무 경험상 손찌검은 습관이다. 한 번도 안 하는 남자는 있어도 한 번만 한 남자는 없다"고 했다. 삼성SDS 직원은 "저런 사람들 특징이 나중에 싹싹 빌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한다. 점점 수위가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한 이용자는 "그럼 앞으로 더 심해지겠지. 이미 신뢰가 깨진 것"이라고 했다. 서울시교육청 직원은 "본인 화난다고 배우자를 발로 차고 목을 치고 위에서 힘으로 눌러 입을 세게 막는다면 그런 폭력성이 잠재돼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쿠팡풀필먼트서비스 소속 이용자는 "나중에 화가 더 나면 칼로 찌를 수도 있는데 네가 막거나 피할 수 있느냐"고 했다. 점점 더 때릴 것이라고 말한 댓글에 작성자는 "나도 이 생각 때문에 말해야 하나 고민된다"고 털어놨다.
폭력의 이유를 찾으려는 일부 댓글에 반박이 쏟아졌다. 한국지역난방공사 직원은 "누구든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는 게 기본인데 맞을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말이 나올 상황이냐"고 했다. 또 다른 서울시교육청 직원은 "맞을 만한 짓을 하면 맞아도 된다는 논리는 죽을 짓을 했으니 죽여도 된다는 논리랑 같은 것 아니냐"고 했다.
부모에게 알리라는 조언도 많았다. 제주항공 직원은 "네가 혼자 끙끙 앓았다는 게 부모한테 더 상처"라며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네 남편이지 말을 전한 네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 댓글에 작성자는 "내 딸이면 무조건 나한테 알려줘야지"라고 답했다. 딸을 키우고 있다는 한 이용자는 "그 상태로 사는 걸 내가 몰랐다는 게 엄마로서 더 돌아버릴 지점"이라고 했다.
볼보그룹코리아 직원은 "지금은 부부상담을 할 게 아니라 가정폭력으로 신고하고 소송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작성자는 결국 "부모님께는 알리지 않을 거고 일단 부부상담부터 받아보려 한다"고 알렸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가정구성원에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배우자를 포함한다. 긴급한 경우 경찰 112에 신고할 수 있다. 여성긴급전화 1366에서는 365일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다.
경찰은 폭력을 제지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는 응급조치를 한다. 재발 우려가 있으면 가해자를 퇴거시키거나 피해자의 주거·직장 100m 이내 접근과 전화·문자 등을 통한 접근을 막는 긴급임시조치를 할 수 있다. 피해자는 법원에 피해자보호명령을 직접 청구할 수도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과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등은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무료 법률구조를 제공한다. 이때 2주 이상의 상해 진단서나 상담소가 발급한 피해 상담 사실 확인서 등이 입증 자료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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