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전시현 기자 |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하원 주도권을 모두 확보하면서 가상자산 업계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원 아래 추진해 온 가상자산 규제 완화와 입법 작업에 제동이 걸리는 동시에 대통령 일가의 가상자산 사업을 둘러싼 의회 조사도 강화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8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지난 3일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과 하원 과반 의석을 확보하면서 가상자산 정책을 둘러싼 정치권의 역학관계가 달라졌다. 새 의회는 내년 1월 출범할 예정으로, 공화당이 주도해 온 가상자산 관련 입법에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가상자산 업계는 규제 완화와 제도권 편입을 추진하며 워싱턴 정가에서 영향력을 넓혀왔다. 백악관의 정책적 지원에 공화당 의회의 협조까지 더해지면서 관련 법안 처리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으나 이번 선거로 정치적 기반이 약해졌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 민주당 양원 장악···클래리티법 처리 난항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분야는 가상자산 시장구조법안인 클래리티법(CLARITY Act)이다.
클래리티법은 가상자산의 법적 성격을 구분하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감독 권한을 정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거래소를 비롯한 디지털자산 사업자의 규제 적용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해당 법안은 지난해 하원을 통과했으나 올해 9월 상원에서 절차 표결 문턱을 넘지 못했다. 스테이블코인 보상 지급과 투자자 보호, 은행권과 가상자산 기업 간 이해관계가 충돌한 데다 트럼프 대통령 일가의 사업 관련 논란까지 입법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민주당은 기존 법안보다 강화된 윤리 규정과 소비자 보호 장치를 요구하고 있다. SEC의 감독 권한을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거론된다. 이에 따라 공화당 주도로 추진된 법안의 원안 통과는 더욱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록체인 보안기업 서틱의 스테판 뮐바우어 미국 정부관계 책임자는 "현재 형태의 클래리티법은 사실상 추진 동력을 잃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법안이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다. 지난해 하원 표결에서는 민주당 의원 70명 이상이 법안에 찬성한 만큼 이해충돌 방지와 투자자 보호 조항을 보완할 경우 초당적 협상의 여지는 남아 있다.
▲ 트럼프 일가 가상자산 사업···의회 조사 확대 가능성
민주당의 의회 장악은 가상자산 업계의 정치자금과 트럼프 대통령 일가의 사업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과 가족이 관여한 가상자산 사업을 대상으로 이해충돌 여부와 정치적 영향력 행사 문제를 조사할 가능성을 제기해 왔다. 특히 트럼프 일가가 연관된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I) 등이 조사 대상에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상원 은행위원회에서는 가상자산 규제 강화를 주장해 온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의원의 위원장 취임이 예상된다.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가상자산 사업을 비판해 온 맥신 워터스 민주당 의원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으로 거론된다.
업계의 정치자금 지출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가상자산 관련 정치활동위원회(PAC)들은 이번 중간선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지만 민주당의 양원 승리를 막지 못했다.
특히 2024년 선거에서 가상자산 업계의 집중적인 반대에 직면했던 셰러드 브라운 전 민주당 상원의원이 이번 오하이오주 상원 선거에서 공화당 현직 의원 존 허스테드를 꺾으면서 업계의 선거 전략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의 오스틴 캠벨 겸임교수는 "가상자산 업계의 주요 인사 상당수가 트럼프 일가와 정치적으로 밀착했다"며 이러한 관계가 향후 업계에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사업적 이해관계가 대통령 직무와 충돌한다는 의혹을 부인해 왔다.
▲ 지니어스법 이미 제정···기존 규제 성과는 유지
정치권의 주도권이 바뀌더라도 트럼프 행정부에서 마련한 가상자산 제도가 곧바로 뒤집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7월 제정된 스테이블코인 규제법인 지니어스법(GENIUS Act)이다. 이 법은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과 발행사 감독,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연방 차원의 규제 기준을 마련했다.
이미 제정된 법률을 폐지하거나 수정하려면 별도의 입법 절차가 필요하다.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더라도 대통령의 거부권 등 제도적 장벽이 남아 있어 기존 법률을 단기간에 전면 개편하기는 쉽지 않다.
행정부 산하 금융감독기관의 규제 정비도 진행 중이다. SEC는 지난 3월 가상자산에 대한 증권법 적용 기준을 제시했으며 CFTC도 관련 해석에 참여했다. 양 기관의 규제 체계 구축은 의회 입법과 별도로 추진될 수 있다.
다만 민주당이 의회의 예산·감사 권한을 활용해 감독기관의 정책 추진 과정을 견제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따라서 기존 제도의 유지 여부와 신규 입법 속도는 구분해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가상자산 업계에서도 민주당과의 협력 관계를 다시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공화당 중심의 정치적 지원에 의존하기보다 투자자 보호와 금융시장 안정 등을 중심으로 초당적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요구다.
미국 투자은행 TD코웬의 재럿 세이버그 워싱턴 리서치그룹 책임자는 "민주당이 트럼프 대통령의 가상자산 사업 연관성을 조사할 것"이라며 "이러한 정치적 환경에서는 업계가 지지할 수 있는 형태의 클래리티법을 추진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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