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평범한 이력서에는 담기지 않는 인생의 기록이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를 내려놓고 농촌으로 향한 의사, 장애를 가진 아이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여성, 세계적인 예술가의 작품을 수십 년간 지켜온 기술자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방송을 통해 소개된다.
EBS 인터뷰 다큐멘터리 ‘보통의 기록 회고’가 11월 9일 첫 방송을 시작한다. ‘평범한 사람은 있어도 평범한 인생은 없다’는 기획 아래 보통 사람 30명의 삶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이다. 화려한 성취나 유명세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선택과 그 이후의 시간을 따라간다.
첫 주에는 정읍에서 주민들을 돌보는 의사 임경수, ‘로봇다리 세진이’의 어머니 양정숙, 백남준의 작품을 제작하고 관리한 이정성, 목수 유진경, 제주 돌담 장인 조환진이 출연한다.
■고액 연봉 대신 농촌 진료소…임경수가 찾은 노년의 행복
전북 정읍 고부보건지소장 임경수(69)의 인생을 다룬다. 그는 국내 응급의료 체계를 세우는 데 기여한 의료계 원로로,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33년간 근무했다. 오랜 시간 응급실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환자들을 치료했던 의사다.
은퇴 후 그에게는 고액 연봉을 받는 병원장직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임경수는 2024년 11월 농촌 의료 현장으로 향했다. 병원은 물론 약국조차 없는 지역 주민들에게 의료 서비스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의료 봉사는 오랫동안 품어온 꿈이기도 했다.
현재 그는 보건지소 2층의 작은 옥탑방에서 생활하며 주민들을 진료한다. 청진기 하나를 주요 의료 도구로 삼아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살피고, 진료가 끝난 뒤에는 이웃들과 일상을 나눈다.
국내 응급의료 현장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의사가 은퇴 후 선택한 곳은 대형 병원이 아닌 시골 보건지소였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리와 경제적 보상보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는 삶을 택한 임경수. 방송은 환자를 살리는 일에 평생을 바친 의사가 노년에 발견한 새로운 행복을 전한다.
■‘로봇다리 세진이 엄마’ 양정숙…입양으로 시작된 인생의 변화
장애를 딛고 수영 국가대표로 올림픽 무대에 도전한 김세진과 그의 어머니 양정숙의 이야기가 공개된다.
선천성 무형성 장애로 두 다리와 오른손 손가락 세 개 없이 태어난 김세진은 수영 선수로 성장해 2016년 리우올림픽 예선에 출전했다. 사람들은 그를 ‘로봇다리 세진이’라고 불렀다. 세진의 도전 뒤에는 어린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오랜 시간 곁을 지킨 양정숙이 있었다.
양정숙이 세진을 처음 만난 곳은 보육원이었다. 여덟 살 딸과 함께 방문했다가 갓난아이였던 세진을 만났고, 아이를 품에 안은 뒤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장애 아동 입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법원의 허락을 구하는 과정을 거쳐 세진을 가족으로 맞았다.
입양 이후에도 어려움은 이어졌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운다는 이유로 주변의 편견과 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세진이 성장해 국가대표 수영 선수로 활약하기까지 양정숙은 엄마로서 아이의 도전을 지켜봤다.
방송은 ‘로봇다리 세진이 엄마’라는 수식어에 가려졌던 양정숙 개인의 삶에도 시선을 보낸다. 평생 엄마의 빈자리를 안고 살아온 그가 한 아이를 품으면서 스스로 엄마가 되어간 시간, 입양이라는 선택 이후 달라진 인생을 들려준다.
■백남준의 작품을 지켜온 82세 기술자…이정성의 손에 남은 40여 년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오랜 시간 함께한 기술 장인 이정성을 만난다.
서울 을지로 세운상가의 오래된 사무실. 브라운관과 전깃줄, 회로 기판이 놓인 작업실에서 82세 이정성은 여전히 전자 장비를 다룬다. 세상에 알려진 그의 별칭은 ‘백남준의 손’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을 계기로 시작됐다. 이후 이정성은 약 20년 동안 백남준의 곁에서 비디오 아트 작품 제작과 설치, 수리를 맡았다. 예술가의 구상을 실제 작품으로 구현하는 데 기술자로서 힘을 보탰다.
백남준이 2006년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정성의 작업은 이어졌다. 그는 거장의 작품을 관리하며 전자 장비의 상태를 살피고, 작품이 지닌 기술적 가치를 보존하는 일을 해왔다.
가난한 시골 소년으로 자라 전축 수리공이 된 뒤 세계적인 예술가의 작업에 참여하기까지. 이정성의 인생에는 기술을 익히고 자신의 능력을 키워온 긴 시간이 담겨 있다. 방송은 백남준이라는 거장의 이름 뒤에서 작품을 지켜온 기술자의 삶과 그가 간직한 기억을 소개한다.
■마흔에 목수로 새 출발…나무에서 삶의 속도를 배운 유진경
이어 가구를 만드는 목수 유진경의 인생이 소개된다.
직장에서 안정적인 경력을 쌓으며 승승장구하던 유진경의 삶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달라졌다. 앞날을 고민하며 걷던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반지하 목공소에서 흘러나온 나무 향기가 그의 마음을 붙잡았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목수의 길을 선택한 순간이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했다. 하루를 사흘처럼 보내며 기술을 익혔지만, 서두르는 과정에서 손가락 하나를 잃는 사고도 겪었다. 이후 그는 나무마다 다루는 속도가 다르듯 사람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유진경에게 가구 제작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밥을 짓고 집을 짓듯 누군가를 위해 가구를 짓는다는 것이 그의 작업 철학이다. 나무를 다루는 과정에서 사람 사이에 오가는 따뜻한 말 한마디의 가치도 배웠다.
그는 국가무형유산 소목장 이수자로 성장했다. 소목은 나무를 재료로 가구와 생활용품 등을 만드는 전통 목공 기술이다. 오랜 수련을 거쳐 전문성을 인정받은 지금도 유진경은 서두르지 않고 나무와 호흡을 맞추며 작업한다. 방송은 직장인의 삶을 뒤로하고 목수로 살아온 그의 도전과 기술자로서 쌓아온 시간을 들려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주 돌담을 쌓다…조환진이 기록하는 돌챙이의 삶
마지막 이야기는 제주 돌담 장인 조환진의 인생을 다룬다.
제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돌담은 오랜 세월 섬사람들의 생활과 함께해 온 문화유산이다. 조환진은 제주에서 돌담을 쌓는 장인을 뜻하는 ‘돌챙이’로 살아가고 있다.
화가를 꿈꾸던 그는 여행 중 돌담이 없는 풍경을 접하면서 제주 돌담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했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돌집을 지으며 돌을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평생 돌챙이로 일해온 아버지의 고된 노동과 기술의 가치를 이해하게 된 것도 이 시기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조환진은 기록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오랜 세월 현장에서 이어져 온 돌담 쌓기 기술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그를 돌담 연구와 기록 활동으로 이끌었다. 개인의 기술을 넘어 제주 사람들의 생활문화와 공동체의 역사에 관심을 넓혀가고 있다.
제주 돌담은 자연에서 얻은 돌을 활용해 쌓은 생활의 흔적이다. 바람이 강한 섬의 환경에 적응하며 형성된 돌담 기술에는 지역 주민들이 오랫동안 축적한 경험이 담겨 있다. 무너진 돌담을 다시 쌓으며 기술을 이어온 돌챙이들의 노동 역시 제주 문화의 중요한 일부다.
방송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기술을 이어가는 조환진의 인생과 제주 돌담에 담긴 생활문화의 가치를 함께 조명한다.
‘보통의 기록 회고’는 보통 사람 30인의 인생 고백을 담은 인터뷰 다큐멘터리로 9일부터 13일까지 오후 5시 50분 EBS1에서 방송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