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가을은 산과 들이 저마다의 색으로 물드는 계절이자 한 해 동안 정성을 쏟은 결실을 거두는 시기다.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린 감은 곶감으로 만들어지고, 바다에서는 살이 오른 고등어가 식탁을 채운다. 수십 년간 가꾼 은행나무 숲에는 황금빛 열매가 익어가고, 김장철을 앞둔 새우젓 경매장에는 좋은 원재료를 확보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EBS '한국기행' 882편 '찬란하다, 가을빛'은 11월 9일부터 13일까지 밤 9시 35분 전국 곳곳을 찾아가 가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소개한다. 경남 산청의 감 수확 현장부터 통영 욕지도의 고등어 양식장, 강원 홍천의 은행나무 숲, 충남 아산의 새우젓 토굴, 경남 합천 황매산의 억새 군락지까지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과 먹거리가 펼쳐진다.
수확의 기쁨과 바쁜 노동, 가족을 향한 마음, 오랜 세월 지켜온 생활 터전이 어우러진 다섯 편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별을 사랑한 남편과 감나무를 가꾸는 아내…산청 산골의 특별한 가을
경남 산청에서 23년째 살아가는 김도현·정정교 씨 부부의 일상은 가을 수확으로 분주하다. 산골 마을에는 주황빛 감이 나무마다 풍성하게 열렸다. 부부는 감을 따고 겨울철 간식인 곶감을 만들 준비에 한창이다.
부부가 수확하는 감은 산청을 대표하는 고종시다. 예로부터 임금에게 진상할 곶감의 원료로 사용됐던 품종이다. 수확한 감을 하나씩 깎아 건조를 준비하는 과정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손길이 필요하다. 부부는 감을 손질하는 한편 단감겉절이와 머위전으로 가을 밥상도 차린다.
산청 생활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정정교 씨가 갱년기를 겪으며 어려운 시간을 보낼 때 남편 김도현 씨는 아내를 위한 별채를 직접 설계하고 지었다. 사방으로 넓은 창을 낸 공간은 아내가 편안하게 머물 수 있도록 마련한 선물이었다. 평소 표현은 서툴지만 아내를 향한 마음만큼은 깊은 남편의 배려가 담겼다.
부부가 산청을 선택한 데에는 남편의 오랜 꿈도 있었다. 어린 시절 우주비행사를 꿈꿨을 정도로 별을 좋아했던 김도현 씨는 밤하늘을 온전히 볼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이곳에 정착했다. 가로등이 없는 산골의 어둠을 활용해 천체망원경을 설치했고, 지붕이 열리는 방바닥 천문대까지 직접 만들었다.
낮에는 감을 수확하고 제철 음식을 나누며, 밤에는 천문대에 누워 별을 바라보는 부부. 농촌 생활과 천체 관측을 함께 즐기는 이들의 일상이 산청의 가을을 특별하게 채운다.
■욕지도 고등어가 가장 맛있는 계절…섬을 지키는 양식업자의 하루
남해의 푸른 바다에 자리한 경남 통영 욕지도는 가을이면 제철 고등어를 맛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살이 오른 고등어가 본격적으로 출하되는 시기를 맞아 섬의 일터도 분주해진다.
곽상민 씨는 25년 전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고등어 양식업을 이어가고 있다. 가을철 고등어는 길이 약 35cm, 무게 350g에 이를 정도로 성장해 맛이 가장 좋은 시기를 맞는다. 상민 씨는 매일 아침 양식장에서 고등어를 준비해 욕지도 곳곳으로 배달한다.
아내 은정 씨와 어머니도 일손을 보탠다. 섬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산지에서 갓 잡은 고등어를 제공하기 위해 고등어회와 고등어조림을 정성껏 준비한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고등어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가족의 노동이 이어진다.
상민 씨 가족의 생활에는 섬 지역의 교육 환경도 영향을 미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없는 욕지도에서 자녀들은 통영에 머물며 학교에 다닌다. 아내 은정 씨 역시 마지막 배가 섬에 도착하면 통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상민 씨는 매일 아내가 배를 타고 섬을 떠나는 모습을 배웅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떠난 뒤 섬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온다. 상민 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며 가을 바다를 즐기고, 섬에 남아 생활하는 다른 가장들과 족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제철 수산물을 길러내는 양식업자의 노동과 가족을 떨어뜨려 놓는 섬의 생활 여건이 함께 담긴다.
■2000그루 은행나무가 황금빛으로…40년 가꾼 홍천의 숲
강원도 홍천의 깊은 골짜기에는 약 4만9600㎡ 규모의 땅에 2000여 그루의 은행나무가 자라는 숲이 있다. 가을이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드는 이곳은 유기춘 씨가 40여 년 동안 나무를 심고 가꿔온 터전이다.
기춘 씨가 처음 나무를 심은 데에는 아내를 향한 마음이 있었다. 아픈 아내가 건강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숲을 일구기 시작했고, 서울과 홍천을 오가며 지내는 아내와 함께 오랜 세월 나무를 가꿨다. 그러나 올해는 여든을 넘긴 아내의 건강을 염려해 기춘 씨 혼자 숲을 돌보고 있다.
가을이면 숲은 전국에서 찾아온 방문객들로 활기를 띤다. 기춘 씨는 단풍철 약 한 달 동안 숲을 무료로 개방해 사람들에게 황금빛 은행나무 풍경을 선물한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가꾼 숲이 많은 사람에게 가을 명소로 자리 잡았다.
숲에는 은행 열매도 풍성하게 열렸다. 기춘 씨는 낯선 마을에 정착해 나무를 가꾸던 시절 도움을 줬던 이진우·안정숙 씨 부부와 함께 은행 수확에 나선다. 나무 아래 떨어진 열매를 거두고 손질하는 작업은 가을철 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수확을 마친 이들은 삼봉약수터로 향한다. 세 개의 봉우리가 모여 있다는 이름처럼 삼봉약수터는 세 봉우리 사이에 자리하며, 톡 쏘는 탄산 맛으로 알려져 있다. 직접 길어 온 약수와 갓 거둔 은행을 활용해 은행약수백숙과 은행감자전을 만들어 나눈다.
은행나무를 심은 한 사람의 정성이 수십 년 뒤 많은 이들이 찾는 숲으로 이어졌다. 황금빛 잎과 열매가 가득한 홍천에서 기춘 씨가 보내는 바쁜 가을을 만날 수 있다.
■김장철 앞두고 새우젓 확보 전쟁…3대째 이어온 90년 젓갈 명가
김장철을 앞두고 새우젓 확보에 나선 김정배·고삼숙 씨 부부의 일상도 소개된다. 겨울 김장에 빠질 수 없는 새우젓은 원재료의 품질과 숙성 과정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좋은 새우를 확보하려는 상인들의 움직임이 바빠지는 시기다.
김정배 씨는 2016년 국내 최초로 해양수산부 새우젓 수산식품명인에 지정됐다. 충남 아산 백석포구에서 외조부 때부터 이어온 젓갈 가문의 3대째 일원으로,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해진 제조 기술을 지켜오고 있다.
좋은 원재료를 확보하기 위한 그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김 씨는 새우젓 경매가 열리는 전남 신안 송도 경매장까지 약 3시간을 이동한다. 경매장에서 큰손으로 알려진 그에게도 새우젓 구매는 만만치 않다. 지난해보다 출하량이 줄어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경매에 참여한 상인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경매를 거쳐 낙찰받은 새우는 숙성 과정을 위해 토굴로 향한다. 1960년 김 씨의 부모가 만든 토굴은 연중 11~13℃의 온도를 유지한다. 외부 기온 변화가 큰 계절에도 일정한 환경에서 젓갈을 숙성할 수 있는 공간이다.
토굴에는 추젓을 비롯해 동백하젓, 오젓, 육젓 등 다양한 새우젓이 보관돼 있다. 황석어젓과 멸치젓, 갈치젓도 함께 숙성된다. 원재료와 시기에 따라 구분되는 젓갈은 각각 다른 풍미를 갖고 있어 김치의 맛에도 영향을 준다.
방송에서는 여러 종류의 젓갈을 활용해 담근 김치와 수육으로 차린 밥상도 소개한다. 3대째 이어온 제조 기술과 김장철을 앞둔 새우젓 시장의 현실, 좋은 젓갈을 만들기 위해 원재료 확보부터 숙성까지 이어가는 명인의 일상을 살펴본다.
■황매산 은빛 억새와 53년 된 식당…합천에서 만나는 가을의 맛
경남 합천과 산청에 걸쳐 있는 황매산은 가을이면 넓은 평원을 가득 채운 억새 군락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은빛 억새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황매산성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계절의 정취가 가득하다.
산행을 마친 뒤에는 합천 토박이 법선 씨가 운영하는 식당을 찾는다. 법선 씨는 53년 전 어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의 모습을 간직한 채 2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어머니에게 배운 조리법을 지키며 지역에서 나는 식재료를 활용한 음식을 손님들에게 내놓는다.
대표적인 음식은 매일 직접 쑤는 도토리묵이다. 여기에 제철 무로 부친 무전과 꽃송이버섯숙회가 더해진다. 어머니에게 전수받은 집된장으로 끓인 된장국도 식탁에 오른다. 합천에서 자란 산나물은 각각의 특성에 맞게 무쳐 산채정식의 풍성함을 더한다.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켜온 식당에는 지역의 식재료와 가족에게 전해진 조리법이 함께 담겨 있다. 황매산의 억새를 감상한 뒤 지역의 맛을 경험하는 여정은 가을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전한다.
산청의 감 수확부터 욕지도의 고등어 양식, 홍천의 은행 채취, 아산의 새우젓 숙성, 합천의 산채 밥상까지. EBS '한국기행' 882편은 가을을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담는 데 머물지 않고, 계절을 맞아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일과 생활을 함께 소개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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