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스물두 장에서 우리는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퇴직급여가 은혜에서 권리로 바뀌는 순간을 보았고, DB의 약속과 붕괴를 보았고, DC와 IRP가 개인에게 자유와 책임을 함께 넘기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수익률 경쟁, 계좌의 연속성, 자동가입, 생애주기 운용, 세금, 수수료, 성과평가, 인출과 장수위험, 기금형과 계약형의 거버넌스, ESG라는 장기 위험까지 따라왔습니다.
이 여행의 목적은 세계 제도를 박물관처럼 구경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20년 전 도입한 퇴직연금이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놓쳤는지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 퇴직연금은 퇴직금을 회사 밖으로 빼내 근로자의 권리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을 연금답게 불리고, 오래 이어가고, 은퇴 후 소득으로 바꾸는 데는 아직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 퇴직연금에는 500조 원(대한민국 퇴직연금 총 적립금이 2026년 기준 500조 원을 넘어서는 상징적 수치)을 넘어서는 거대한 돈이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다는 것만으로 연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은 들어와야 하고, 오래 머물러야 하고, 제대로 굴러가야 하고, 끊기지 않고 사람을 따라가야 하며, 마지막에는 평생소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Part 1이 그 흐름이 어디서 끊기는지 진단했다면, Part 2는 세계가 그 끊김을 어떻게 고쳐 왔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그 긴 여행을 세 가지 질문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질문들은 곧 Part 3에서 한국형 해법으로 바뀌어야 할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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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질문 — “어떻게 불릴 것인가?”
세계가 먼저 던진 질문은 수익률의 질문입니다. 퇴직연금은 안전하게 보관하는 돈이 아니라, 수십 년 뒤 노후소득이 되도록 불어나야 하는 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계가 보여준 답은 단순히 “주식 비중을 높여라”가 아니었습니다.
호주는 성과를 측정하고, 실패한 기금에 경고를 보내고, 반복해서 실패한 상품은 신규 가입자를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산업별 기금이라는 큰 그릇으로 규모와 협상력을 만들었습니다. 암박츠히어는 좋은 성과가 우연한 종목 선택이 아니라 의사결정, 권한위임, 실행, 평가가 이어지는 거버넌스 품질에서 나온다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캐나다는 조성과 운용을 분리해 정치와 전문성의 경계를 세웠습니다. 미국 401(k)는 계약형에 가까운 구조에서도 상품 선정과 디폴트 투자상품에 대한 책임을 물었습니다. ESG는 긴 돈이 미래의 위험까지 오늘의 판단에 넣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답은 “기금을 만들면 된다”가 아닙니다. 핵심은 누가 가입자 편에서 목표를 정하고, 누구에게 운용을 맡기며, 어떤 기준으로 성과와 비용과 위험을 평가할 것인가입니다. 기금형은 이 질문에 답하기 좋은 강력한 그릇입니다. 그러나 계약형도 선택설계와 상품선정과 성과평가의 책임을 보이게 만들면 거버넌스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세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돈을 그냥 맡기지 말고, 책임의 구조를 세워라.” 수익률은 상품 목록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 위임, 경쟁, 평가, 피드백이 이어지는 구조에서 나옵니다.
두 번째 질문 — “어떻게 태울 것인가?”
두 번째 질문은 가입의 질문입니다. 좋은 제도도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특히 퇴직연금은 강한 사람만 올라타는 제도여서는 안 됩니다. 행정력이 약한 중소기업, 이직이 잦은 근로자, 경계가 애매한 노동자도 먼저 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영국의 자동가입과 NEST는 개인의 결심을 기다리지 말고 제도의 기본값을 바꾸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PPA와 QDIA는 사람이 선택하지 못할 때 방치하지 말고 장기투자에 맞는 기본 경로를 만들라고 말했습니다. 호주의 스테이플링은 사람이 직장을 옮겨도 계좌가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푸른씨앗은 작은 사업장도 받아 줄 공적 그릇이 필요하다는 방향을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신청해야 들어오는 제도라면, 자동으로 찾아내고 자동으로 태우는 장치와는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세계가 보여준 것은 인간을 탓하지 않는 제도였습니다. 사람은 미루고, 복잡하면 멈추고, 손실이 두려우면 안전한 곳으로 숨습니다. 그러니 좋은 연금제도는 “왜 선택하지 않았느냐”고 묻기 전에, 선택하지 않아도 나쁜 곳으로 떨어지지 않게 설계해야 합니다.
세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태워라.” 가입은 개인의 용기만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명단을 만들고, 기본값을 정하고, 계좌를 이어주고, 작은 사업장도 받아 주는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세 번째 질문 — “어떻게 쓸 것인가?”
세 번째 질문은 출구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적립과 운용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연금은 모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은퇴 후 너무 빨리 써버려도 실패이고, 너무 두려워 쓰지 못해 삶이 가난해져도 실패입니다.
호주의 은퇴소득 논쟁은 적립 단계에서 성공한 나라조차 인출 단계에서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연금화의 퍼즐은 사람들이 평생소득의 가치를 알면서도 감정적으로, 제도적으로, 상품적으로 그것을 꺼린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영국의 연금 자유화는 자유로운 인출이 매력적이지만, 질문과 경로 설계가 없으면 현금화와 방치로 흐를 수 있다는 경고를 남겼습니다.
한국은 이 질문을 아직 충분히 붙잡지 못했습니다. 세법상 10년 이상 나누어 받으면 연금으로 인정되는 구조는 있지만, 그것이 곧 평생소득을 보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국민연금, 주택연금, 일반 보험사의 종신연금보험, 퇴직연금 기금과 투자형 인출계좌가 각각 어떤 위험을 맡을지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세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목돈을 소득으로 바꿔라.” 퇴직연금은 퇴직 위로금이 아니라, 오래 사는 위험을 나누고 현금흐름을 설계하는 장치여야 합니다.
세 질문을 잇는 하나의 단어
이 세 질문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불릴 것인가, 어떻게 태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겉으로는 수익률, 가입률, 인출 방식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모두 같은 질문으로 모입니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Fiduciary Responsibility, Part 2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제의식으로 적립·가입·운용·인출의 전 과정에서 가입자 이익을 대신 지키고 감시하는 수탁자 주체의 확립).
누가 상품 목록을 만들고 기본값을 정하는가. 누가 비용을 묻고 성과를 비교하는가. 누가 계좌가 끊기지 않게 하는가. 누가 장수위험을 나누는 구조를 설계하는가. 누가 운용사를 감시하고, 누가 미래의 위험을 오늘의 의사결정에 넣는가.
이것이 Part 2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통찰입니다. 연금 선진국의 비밀은 특정 상품 하나, 특정 세제 혜택 하나, 특정 기금 이름 하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는 늘 책임의 구조가 있었습니다. 보이는 기금 이사회일 수도 있고, 회사 안의 401(k) 위원회일 수도 있고, 국가가 만든 자동가입 시스템일 수도 있고, 성과평가와 공시의 규칙일 수도 있습니다. 형태는 달라도 핵심은 같습니다. 가입자를 대신해 묻고, 맡기고, 감시하고, 고치는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설계도를 펼칠 시간이다
이제 진단(Part 1)과 통찰(Part 2)은 끝났습니다. Part 1은 한국 퇴직연금의 돈이 어디서 끊기는지 보여주었습니다. Part 2는 세계가 그 끊김을 어떻게 제도와 시장과 거버넌스로 고쳐 왔는지 보여주었습니다.
남은 것은 한국형 답입니다. 한국은 네덜란드가 될 수도 없고, 캐나다가 될 수도 없고, 미국 401(k)를 그대로 복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던진 질문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돈을 어떻게 불릴 것인가. 사람들을 어떻게 먼저 태울 것인가. 은퇴 후 그 돈을 어떻게 평생소득으로 바꿀 것인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누가 가입자 편에 설 것인가.
다음 Part 3에서는 이 질문들을 한국의 제도 언어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기금형의 세 유형, 계약형 안의 위원회와 선택설계 책임, 자동가입과 디폴트 구조, 계좌와 세제 정보의 연속성, 사각지대를 품는 공적 그릇, 인출과 연금화의 경로, 성과평가와 공시, 그리고 기술 인프라까지. 이제 세계여행에서 돌아와, 우리의 설계도를 펼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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