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관객의 연결 고리는 사소한 것에서 생겨나기도 해요.
때로는 하나의 접점이 저마다의 삶에 큰 울림을 자아낼 수도 있겠죠.”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를 부산국제영화제의 특별상영 작품으로 선택하며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배우 샤를로트 갱스부르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영화에 녹여내는 열정과 관객의 마음에 피어나는 감정,
낯선 세계에 잠시 들어가보는 경험의 힘에 관한 대화가 고요하게 이어졌다.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부산에서 마주하다니 뜻깊네요.(웃음)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이라고 들었어요.
어제 부산에 도착했고, 그 전에는 이틀 동안 서울에 머물렀어요. 리움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이 기억에 남네요. 월요일이라 원래 관람객을 맞지 않는 날이었는데, 감사하게도 저를 위해 문을 열어주셨어요. 한적한 미술관을 둘러보니 생경한 기분이 들더군요. 한국의 고미술부터 현대 예술가의 작품까지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도 특별하게 다가왔고요.
유독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이 있었나요?
사진을 찍어뒀는데, 잠시만요. (휴대폰 속 사진들을 찾아 보여주며) 이렇게 꽃과 새가 그려진 회화가 여러 점 있었는데 보고 있으니 감동이 밀려왔어요. 오래전 한 여성 작가가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들었어요. 캡션에 적힌 작가 이름이… 신사임당이네요.
소장품 중 ‘고대 명화첩’에 시선이 갔군요. 신사임당은 5백여 년 전의 사회적 제약 속에 서도 그림과 시를 통해 예술적 재능을 펼친 여성이에요.
그런가요? 인상적이네요.(웃음)
부산에서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이제 막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어요. (해운대) 해변도 거닐어봤는데 참 좋더군요. 스페셜 토크와 씨네클래스를 비롯한 공식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도시 곳곳을 돌아보거나 다른 영화를 관람할 여유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아쉽지만, 그래도 부산을 찾아온 관객과 배우, 감독들을 만날 기회가 있어 기뻐요.
그동안 여러 영화제 현장을 경험해왔죠. 분위기가 서로 다를 듯한데 어떤가요?
맞아요.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감상은 아직 선명하지 않지만 칸, 베니스, 토론토 등을 찾아갔을 때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어요. 규모가 작은 영화제는 특유의 친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있고요. 그런데 주변 환경과 관계없이, 결국 영화에 집중하게 한다는 게 영화제의 미덕이 아닐까 싶어요. 어디서 무엇을 하든, 다시 영화 곁으로 돌아와 관객으로 북적이는 현장 에 함께하게 되니까요. 훌륭한 상영작들이 좋은 영화제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인 라스 폰 트리에(이후 ‘라스’) 감독의 <멜랑콜리아>(2011)를 직접 선택했어요. 행성 ‘멜랑콜리아’와 지구의 충돌을 앞둔 한 가족의 불안과 붕괴를 그린 작품으로, 자매인 ‘저스틴’(커스틴 던스트)과 ‘클레어’(샤를로트 갱스부르)를 중심으로 전개되죠. 이 영화를 관객과 나누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이 좋아해줄 만한 영화를 고르고 싶었어요. 저에게 큰 영향을 미친 라스와 함께한 세 편의 영화 중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안티크라이스트>(2009)나 수위가 높은 <님포매니악>(2013)보다 <멜랑콜리아>가 제격일 것 같았죠. 관객의 마음을 열고 하나로 모아줄 수 있는, 아름답고도 강력한 힘을 지닌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멜랑콜리아>를 10여 년 만에 다시 봤어요.
정말요? 여전히 강력한 영화라고 느꼈나요?
그럼요. 영화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와닿는다는 것도 새삼 실감했어요. 예전에는 저스틴에게 마음이 갔는데, 이제는 클레어의 심정을 더 헤아리게 돼요.
그렇군요. 저도 내일 스페셜 토크에 앞서 객석에 앉아 <멜랑콜리아>를 관람할 예정인데,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15년 전 칸에서 스크린으로 접한 이후 한 번도 다시 본 적이 없어 더욱 기대돼요.(웃음) 배우로서 참여한 영화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기억하는 편이라 이번의 감상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클레어에 대한 기억을 복기해본다면요?
클레어는 아주 체계적인 인물이에요. 모든 상황을 계획하고, 정리하고, 통제하려 하죠. 그런데 커다란 행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는 소식을 접한 후 공황 상태에 빠져요. 삶의 끝, 세상의 종말을 두려워하면서요. 반면 그의 동생 저스틴은 우울과 좌절 속에 있다가 재난을 앞두고 오히려 차분해져요. 상반된 성향을 지닌 두 사람이 위험을 맞닥뜨리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클레어와 저스틴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요. 인간에게는 여러 면이 공존하기 마련이니까요. 이처럼 대립하는 요소를 한 작품에 담아내는 건 흥미로운 작업이에요.
<멜랑콜리아>를 다시 관람할 때 어떤 점에 주목하려고 하나요?
라스와 작업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더군요. <멜랑콜리아>를 통해 라스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보고 싶어요. 그와 협업한 경험을 나누는 것도 귀중한 시간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어요. (상영 후 이어진 스페셜 토크에서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멜랑콜리아>를 보며 감독이 그리워졌고, 그와 세 편의 영화를 함께할 수 있었다는 데 감사한다는 소감을 전했다. 더불어 숏을 선택하고 편집하는 방식, 사소하지만 중요한 요소를 담아내는 태도 등을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협업하는 과정 중 가장 선명히 각인된 경험은 무엇인가요?
저스틴과 클레어, 클레어의 아들 ‘레오’가 행성 충돌을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을 찍은 날이 떠오르네요. 연기하기 매우 힘들고, 감정적으로도 버거운 순간이었죠. 무사히 촬영을 마쳤는데, 며칠 뒤 라스가 제 숏을 더 찍고 싶다는 거예요. 예상치 못한 표현으로 본인을 놀라게 해달라면서요. 아마 종말을 앞둔 자의 날것 같고 동물적인 반응을 원한 게 아닐까 싶어요. 결국 그 장면을 세 번이나 다시 찍어야 했어요. 무척 긴장되었지만, 라스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어요. 영화는 감독의 손에 맡겨진 예술이니까요.
한 인터뷰에서 “나는 라스를 만나기 전후로 나뉜다”라고 말한 적이 있죠. 그와 함께하는 작업은 어떤 점에서 그토록 각별했나요?
라스와의 작업은 다른 감독들과 일할 때는 경험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어요. 라스는 어떤 사람이냐면, 프랑스어로 ‘exigeant’ 인데 영어로는… (휴대폰으로 단어를 검색한 뒤) ‘demanding’, 까다로운 사람이에요. 늘 “모든 장면은 백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실제로 첫 테이크를 앞두고 아무런 디렉팅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리허설 없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촬영이 시작됐죠. 그때부터는 본능에 의지해야 했고, 배우뿐 아니라 현장의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였어요.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제야 “별로네요. 다시 합시다. 이번엔 이렇게 해볼까요?” 하면서 다른 시도를 이어가더군요. 그런 방식이 저를 위축시키거나 불편하게 하진 않았어요. 장면에 조금씩 생기를 불어넣고, 찰나에서조차 진실을 포착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러면서 연기와 영화에 대해 어느 때보다 많이 배웠어요.
과정이 지난한 만큼 성취감도 컸을 거라 짐작해요.
맞아요. 초반에는 장면 속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게 두려웠고, 잘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괴로웠어요. 하지만 일하는 과정이 즐거울 수만은 없잖아요. 오히려 힘들게 몰두하는 작업을 선호하기도 해요. 물론 모든 게 정돈된 현장에서 빠르게 촬영해야 할 때가 있고, 한 테이크 만에 끝내야 효율적일 수도 있죠. 그런데 충분히 탐색했다고 느껴야 미련이 남지 않는 것 같아요. 연기를 통해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는 여정을 이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멜랑콜리아> 상영 전 씨네클래스 ‘샤를로트 갱스부르, 그 고요함 속의 열정’이 진행돼요. 강연 제목이 잘 어울리는 듯한데, 스스로 느끼기에는 어떤가요?
음…. 물론 고요한 시간을 즐기는 편이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감정에도 공감해요. 하지만 강렬하고 격정적인 순간도 좋아해요.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씨네클래스에서 “대중은 나를 부드럽고 여린, 한 가지 면만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 다른 면도 보여주고 싶다. 영화 속 세계에서는 그럴 수 있다”라고 말했다.) ‘고요’와 ‘열정’의 조합이 재미있네요. 제게 열정이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각이거든요.
그런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 같나요?
어떤 일에 깊이 감명받거나 무언가를 더 알아가고 싶어지면 아주 열정적인 사람이 돼요. 그랬기에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거겠죠. 앞으로도 무언가를 섣불리 단정 짓거나 모든 걸 안다고 확신하지 않고, 더 많이 배워 갈 수 있기를 바라요.
많은 이들이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배움과 성장을 오랜 시간 지켜봤어요. 제인 버킨의 딸로 일찍이 주목받은 후 <귀여운 반항아>(1985)로 세자르 영화제 신인여우상을, <안티크라이스트>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의 결실을 쌓아가고 있죠. 40여 년의 커리어를 돌아보면 어떤가요?
길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현장을 겪어봤고,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모든 일이 매번 새롭게 다가오더군요. 아마 다른 분야의 일을 병행하는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영화를 찍다가 음악을 만들고, 패션이나 사진에 관심을 두기도 하죠.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아니라, 잠시 다른 곳에 갔다가 돌아오는 과정의 연속인 거예요. 그래서 새 작품에 들어 갈 때마다 처음 하는 것처럼 여겨져요. 낯선 일에 계속 도전하는 게 저한테는 가장 중요하고, 그만큼 호기심을 잃지 않고 싶어요.
호기심을 지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사람과의 만남이요. 흥미로운 시선과 방식을 경험하게 해줄 영화인과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요. 그게 이 일의 가치를 실감하게 해주기도 해요. 누군가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보는 건 무척 설레는 일이에요.
영화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나요?
‘감정’과 ‘시네마토그래피(영화 촬영)’요.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두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야 해요. 물론 감정이 배제된, 건조하고 냉정한 영화도 미장센 등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영화가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 감정은 자기만의 것이어야 하죠. 관객이 일방적으로 전달받기만 하는 방식은 지양해요.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작품을 온전히 이해했는지는 중요치 않아요. 영화가 끝난 뒤 남아 있는 감정, 결국 그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가 그저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는 거군요.
그렇죠. 영화와 관객의 연결 고리는 사소한 것에서 생겨나기도 해요. 때로는 하나의 접점이 저마다의 삶에 큰 울림을 자아낼 수도 있겠죠. 영화는 우리를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동시에 익숙한 순간들을 발견하게 하기도 하잖아요. 그게 곧 영화가 지닌 힘이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