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고기국수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이면 더욱 생각나는 향토음식이다. 가을이 깊어진 제주에서는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거나 관광지를 걷다가 따뜻한 국물 음식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제주에는 흑돼지구이와 갈치조림, 전복뚝배기처럼 널리 알려진 음식이 많다. 그중 고기국수는 제주 곳곳에서 맛볼 수 있어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메뉴다. 제주공항에 도착한 뒤 첫 식사로 먹거나 여행을 마치기 전에 들러 먹는 사람들도 있다.
고기국수는 이름만 들으면 일반적인 국수에 돼지고기 몇 점을 올린 음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먹어보면 평소 접하던 잔치국수와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제주에서는 고기국수 특유의 맛을 표현할 때 '베지근하다'는 말을 사용한다. 제주에서만 접할 수 있는 음식문화와 관련된 표현이다.
제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즐겨 먹었던 고기국수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지금부터 고기국수의 특징과 탄생 배경, 제주에서 함께 즐길 수 있는 향토음식까지 알아본다.
돼지고기 육수에 굵은 면과 수육을 올리는 고기국수
고기국수는 돼지고기를 삶아 만든 국물에 밀국수를 넣고 수육을 올려 먹는 제주 향토음식이다. 제주에서는 '돼지국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인 잔치국수는 멸치나 다시마를 우려낸 국물을 주로 사용하지만 고기국수는 돼지고기와 돼지 뼈를 활용해 육수를 만든다.
육수의 색과 맛은 식당마다 차이가 있다. 돼지 뼈를 오래 고아 뽀얀 국물을 내는 곳이 있는가 하면 돼지고기를 삶은 국물을 활용해 비교적 맑고 담백한 맛을 살리는 곳도 있다.
또한 고기국수에는 가는 소면보다 굵은 중면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중면은 소면보다 씹는 맛이 좋고 한 가닥씩 입안에서 느껴지는 식감도 다르다.
국수 위에는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썬 돼지고기 수육을 올린다. 살코기가 많은 부위는 담백하고 지방이 붙은 부위는 부드럽고 고소하다.
고기를 두툼하게 써는 식당에서는 수육 자체의 식감을 즐길 수 있다. 반면 얇게 썬 고기를 여러 점 얹는 곳에서는 면과 함께 집어 먹기 편하다. 여기에 대파와 당근 등을 고명으로 올리고 식당에 따라 고춧가루나 깨, 후추를 곁들이기도 한다.
제주 사람들은 이러한 고기국수의 맛을 '베지근하다'고 표현한다. 제주어에서 고깃국물처럼 기름지고 구수하면서 깊은 맛이 느껴질 때 사용하는 말이다.
고기국수를 처음 먹는다면 양념장을 넣기 전에 국물부터 맛보는 편이 좋다. 이후 취향에 따라 후추나 고춧가루를 조금씩 더하면 된다.
함께 나오는 김치나 깍두기도 곁들이기 좋다. 아삭한 김치를 한입 먹으면 돼지고기의 기름진 맛을 덜어주면서 다음 젓가락을 들기에도 좋다.
고기국수는 돼지국밥과 비교되기도 한다. 두 음식 모두 돼지고기를 활용하지만 돼지국밥은 밥을 곁들이고 고기국수는 밀국수를 넣는다는 차이가 있다.
잔칫날 돼지고기를 나누던 풍습에서 탄생한 음식
고기국수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주 사람들이 돼지고기와 곡물을 먹어 온 방식이 드러난다. 과거 제주는 화산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쌀농사를 짓기 어려운 지역이 많았다. 따라서 보리와 메밀을 활용한 음식이 발달했다.
특히 메밀은 제주에서 오래전부터 재배하던 곡물이다. 메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어 국수를 썰거나 곡물을 가루로 만들어 끓인 범벅 등을 먹었다. 메밀 반죽을 칼로 썰어 만든 국수는 '칼국' 또는 '칼싹두기'라고 불렀다. 이러한 음식은 마을 행사나 공동체 의례에서도 먹었다.
지금처럼 밀가루로 만든 건면이 제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무렵이다. 당시 제주항과 서귀포항, 성산포항, 한림항 등 주요 항구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밀가루와 건면 우동이 유입됐다.
중국 산둥성 출신 화교들이 제주에 정착하면서 호떡과 만두, 국수를 판매하는 음식점도 생겨났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산 밀가루가 공급됐으며 장터에 건면 제조업소가 들어섰다. 한국전쟁 이후 밀가루 원조와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이 이어지면서 밀가루 음식도 널리 퍼졌다.
제주에서는 집안에 잔치가 있거나 상을 치를 때 돼지를 잡아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풍습이 있었다. 당시 돼지는 집안의 큰 행사를 치를 때 사용하는 귀한 가축이었다. 돼지를 잡는 날에는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모였고 삶은 고기와 국물을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이러한 음식문화는 밀국수가 보급되면서 새로운 형태로 이어졌다. 고기를 삶은 국물에 건면을 말아 내고 돼지고기와 순대, 두부 등을 별도의 접시에 담아 함께 제공했다.
고기와 여러 음식을 담은 접시는 '고깃반'이라고 불렀다. 국수와 고깃반을 함께 내는 방식은 제주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음식문화의 하나였다.
1973년 가정의례준칙이 제정된 뒤에는 경조사에서 쌀밥 대신 국수를 대접하는 방식이 권장됐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국수는 제주의 경조사 음식으로 더욱 널리 자리 잡았다.
오늘날 식당에서 판매하는 고기국수의 모습이 갖춰진 시기는 1980년대 중반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제주에서는 감귤산업과 관광산업이 성장했고 양돈 농가에서 기르는 돼지도 늘어났다. 돼지고기 공급이 확대되자 대중식당에서도 수육을 활용한 국수 메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국수 한 그릇에 돼지고기 세 점가량을 고명으로 올려 판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고 고기국수 전문점도 생겨나면서 지역 주민들이 먹던 국수가 제주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알려졌다.
택시기사들이 찾던 국수문화거리에서 관광객 먹거리로
제주시 일도2동에는 고기국수를 판매하는 식당들이 모여 있는 국수문화거리가 있다. 국수문화거리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인근 신산로와 삼성로 일대에 조성된 음식 특화거리다.
제주 원도심에서 국수를 먹으려는 사람들이 찾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국숫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당시에는 관광객보다 지역 주민들이 많이 찾았다. 특히 점심을 해결하려는 택시기사들과 늦은 밤 술을 마신 뒤 국물 음식을 먹으려는 손님들이 국숫집을 이용했다.
이후 식당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국수를 판매하는 거리로 알려졌다.
2009년 4월에는 이 일대 국숫집 상인들이 국수문화거리회를 결성했다. 상인들은 매달 11일을 '국수데이'로 정하고 국수 가격을 할인하는 행사도 진행했다.
국수문화거리 주변에는 삼성혈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신산공원 등이 자리한다. 제주 원도심을 둘러보다가 식사하기에도 좋은 위치다.
이곳에서는 고기국수 외에도 제주에서 즐겨 먹는 국수 메뉴들을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음식이 '멸고국수'다. 멸고국수는 멸치로 만든 육수에 국수를 말고 돼지고기 수육을 올린 음식이다. 멸치국수의 시원한 맛을 즐기면서 돼지고기도 함께 먹을 수 있다.
비빔고기국수도 있다. 뜨거운 국물 대신 매콤새콤한 양념에 면을 비벼 먹는 방식이다. 식당에 따라 돼지고기를 고명으로 올려 제공하며 채소를 함께 넣기도 한다.
국수와 별도로 돔베고기를 주문하는 방법도 있다. 돔베고기는 삶은 돼지고기를 도마 위에 올려 썰어 내는 제주 음식이다. '돔베'는 제주어로 도마를 뜻한다.
일반적인 수육과 비슷하지만 도마에 고기를 올려 내는 제주식 상차림에서 이름이 붙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식사할 때는 돔베고기를 주문해 나눠 먹기도 한다.
제주 국숫집에서는 몸국을 판매하는 곳도 있다. 몸국은 돼지고기를 삶은 국물에 모자반이라는 해조류를 넣어 끓이는 음식이다. 제주에서는 모자반을 '몸'이라고 부른다.
모자반은 바다에서 자라는 갈조류로 국물에 넣고 끓이면 특유의 식감을 느낄 수 있다. 제주에서는 몸국에 메밀가루를 넣어 국물을 걸쭉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 다른 제주 음식으로는 아강발이 있다. 아강발은 어린 돼지의 발을 삶아 만든 음식이다. 오랫동안 삶아 살과 껍질을 부드럽게 익히며 제주에서는 초장 등을 곁들여 먹기도 한다. 일반적인 돼지족발보다 크기가 작아 손으로 들고 먹기에도 좋다.
제주에는 돼지의 피와 내장을 이용해 만드는 '수애'라는 음식도 전해진다. 수애는 제주식 순대로, 당면 대신 보리와 메밀가루, 선지 등을 넣어 만든다. 돼지를 잡는 날 고기와 내장을 음식에 활용하던 풍습에서 비롯됐으며 일반적인 당면순대와 달리 곡물의 구수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Copyright ⓒ 위키푸디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