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태국)=정우빈 작가] 무료한 일상이다. 집에서 일하는 생활 방식 탓인지, 오늘도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룬 채 컴퓨터 옆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약간의 그림자가 섞인 회색빛의 하얀 벽은 그저 그렇게 내 눈과 마주하고 있다.
느지막이 울리는 ‘카톡’ 소리가 고요를 깬다. 메시지를 보낼 사람이 딱히 없는데, 친구의 부고 소식이다. 사람이 놀라면 풀어져 있던 다리가 곧게 펴지며 벌떡 일어나게 되나 보다. 한동안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다 거실 베란다 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본다.
타국에서 너가 있었던 곳과 이어져 있는 것은 하늘뿐이니. 그저 별수가 없다.
-2023년도 어느날의 독백-
태국과 한국을 오간 지 어느덧 3년이 되어 간다. 태국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에는 일정이 있을 때마다 들어오는 이상한 방식의 삶을 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친구에게 귀국을 언제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도 모르게 태국을 말하는 건지 한국을 말하는 건지 되물은 적이 있다. 비행기로 6시간 떨어진 두 나라는 그렇게 멀고도 가깝게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 아니었던 나에게 6시간의 비행은 좀이 쑤시는 일이었다.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벗은 채 맨발로 비행기 바닥의 털을 매만지며 말없이 이어지는 시간을 견뎠다.
처음 태국에 도착했을 때는 습하고 무거운 공기가 코를 통해 머릿속에 달라붙는 듯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간판의 꼬불꼬불한 곡선들은 당시 내 마음의 상태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계획 없이 도망치듯 도착한 방은 작았고 창문도 좁았다. 풀지 않은 캐리어를 옆에 둔 채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을 곱씹었다.
작업은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그 의미를 설명하는 일에 짓눌려 목적을 잃었고, 전시를 위한 전시의 반복은 나를 빠르게 지워갔다. 한국에서 시간과 돈을 들여 켜켜이 쌓아온 것들은 이곳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익숙하게 드나들던 화방도, 전시를 보아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도 없었다.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때 나를 지탱해 주었던 것들로부터 멀어진 방 안에는 텅 빈 마음만 남아 있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이곳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작업할 때는 보이는 것들을 의심하고 그 안에서 새로움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이미 낯설고 새로웠다. 정류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야생 닭들, 길을 떠도는 개들, 천천히 지나가는 왕도마뱀에도 무심한 사람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풍경은 그 자체로 충분히 낯설었다.
나는 다시 재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도를 검색해 화방을 찾아가 캔버스 천과 물감, 붓을 하나씩 사들였다. 방 안의 간이침대를 치우고 작은 테이블을 들여놓으면서 방은 조금씩 작업실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일상에서 마주한 풍경들을 천 위에 옮겼다. 이전처럼 작업의 명분이나 목적을 먼저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본 것을 그리고, 그 그림을 바라보며 만족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시작한 그림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과물이라기보다, 내가 이곳에서 보고 지낸 시간을 모으는 일에 가까웠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달라진 것 또한 있었다. 낯선 풍경은 이제 익숙해졌고,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애써온 시간은 내 안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쌓였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것은 버림이라기보다 다시 쌓아가는 일에 가까웠다. 그 시간은 지하철을 타는 법부터 그림을 그리는 방식까지, 일상의 많은 것들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다. 나는 무엇인가 어느 한쪽에 완전히 속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두 나라 사이를 오가며 어느 곳에서는 잠시 떠나온 사람이 되고, 다른 곳에서는 다시 돌아온 사람이 된다. 하지만 이제 그 상태가 예전처럼 불편하지만은 않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감각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보다, 눈앞에 놓인 것들을 바라보고 그리는 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림은 그렇게 별다른 목적 없이 쌓아온 시간들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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