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장터에 업종을 ‘약국’으로만 등록한 업체가 국립박물관 건립 현장에 공급할 내진철근 9억9500만원어치를 낙찰받았다. 등록 직원은 없었다. 장의·장묘용역만 등록한 업체들도 대학과 연구기관의 실험기자재 낙찰자로 선정됐다.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공조달 데이터를 분석해 제시한 사례다. 등록 업종과 인력만으로 위법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낙찰자가 실제 공급 능력과 계약이행 책임을 갖췄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주거지 등록 업체 7063곳, 3년간 2만1498건 낙찰
4일 황정아 의원실이 2023년 11월부터 2026년 10월까지 나라장터 물품·용역 개찰결과와 조달업체 등록정보를 인공지능(AI) 에이전트로 분석한 결과 등록 이력 기준 업체 90만4759곳 가운데 등록 직원이 0~1명이면서 주소가 아파트·빌라 등 주거지로 분류된 업체는 6만7568곳이었다. 이 중 낙찰 이력이 확인된 업체는 7063곳으로, 낙찰 건수는 2만1498건, 금액은 1조3862억원이었다.
주거지 등록 여부와 별도로 약국·급식·장례업·여행사 등 생활업종만 등록한 업체가 해당 업종과 무관한 장비·자재를 낙찰받은 사례는 109곳, 252건, 226억원으로 집계됐다. 두 집계는 선정 기준이 다르고 업체가 중복될 수 있어 합산 대상이 아니다.
의원실이 제시한 경남 김해의 약국은 내진철근 외에도 지자체 굴착기와 해군 신호발생기 등 총 15건, 20억6000만원어치를 낙찰받았다. 대구의 미용실 상호 업체는 가스엔진히트펌프(GHP) 실외기 3억9000만원과 산불 진화장비 2억8000만원의 낙찰자로 선정됐다.
전북 익산의 장례업체 두 곳은 조달청 등록 업종이 장의·장묘용역뿐이었지만 실험실습기자재와 강판, 오실로스코프 등을 각각 31건·22억7000만원, 27건·19억원어치 낙찰받았다. 등록 직원은 각각 1명과 0명이었다.
다수 품목을 등록하고 반복적으로 투찰한 사례도 나왔다. 인천 송도의 한 업체는 등록 직원 1명에 공급품명 4151개를 등록했다. 3년간 8590회 투찰해 68건, 112억8000만원을 낙찰받았다. 낙찰 품목에는 철도차량 부품 중정비, 여객선 주기관, 인공신장기 등이 포함됐다.
의원실은 공공데이터 API 호출 과정에서 일부 개찰 건이 누락될 수 있어 낙찰 건수와 금액은 최소 집계치라고 설명했다. 등록업체 전체 수에는 폐업·말소 업체가 포함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집계한 1조3862억원은 해당 조건에 부합하는 업체들의 낙찰금액이다. 부정이익이나 재정 손실을 산정한 금액은 아니다. 개별 사례의 적정성을 판단하려면 입찰 당시의 참가자격과 등록정보, 계약 체결 여부, 납품·검수 결과를 대조해야 한다.
▲입찰보증금 확대와 공급 능력 심사
조달청은 오는 16일부터 페이퍼컴퍼니 의심업체에 입찰보증금을 부과한다. 업체등록정보와 계약정보 등을 활용해 대상을 선별할 예정이다. 2027년부터는 기타공급품명을 500개 초과해 등록하는 업체에 유효기간 1년의 신용평가등급확인서를 제출하도록 할 계획이다.
군수품 조달에서도 관리 강화가 추진된다. 조달청은 지난 3일 군용 전투조끼 제조현장을 점검하고 군수품 공급입찰 참여 업체 전체에 입찰보증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계약이행 실태점검과 생산능력 사전점검을 실시하고, 장병 안전과 직결되는 품목의 검사도 강화할 방침이다.
조달청에 따르면, 지난 8월부터 일부 품목에 입찰보증금을 시범 부과한 결과 입찰 건당 평균 투찰업체 수는 355곳에서 57곳으로 83.9% 감소했다. 이는 입찰 참여 감소를 보여주는 수치다. 납품 품질과 계약이행 개선 여부는 납기 준수율, 검사 불합격률, 하자 처리 실적 등으로 별도 확인해야 한다.
공급 능력 심사는 계약의 특성에 맞춰야 한다. 제조업체의 제품을 확보해 운송·설치하고 하자 대응을 맡는 공급업체도 공공조달에서 역할을 한다. 직접생산이나 특정 허가·면허가 요구되는 계약인지, 외부에서 제품을 조달해 공급할 수 있는 계약인지에 따라 확인할 요건이 달라진다.
점검 대상은 낙찰자의 실제 업무와 책임이다. 물품 확보 경로와 납기 계획이 마련돼 있는지, 설치·교육과 하자 대응을 누가 담당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낙찰자가 계약상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다른 업체에 사실상 이행을 맡겼다면 해당 계약조건에 따라 적정성을 검토해야 한다.
AI는 등록정보와 입찰 내용의 불일치를 찾아 심사 대상을 선별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업종과 공급품명, 투찰 이력, 과거 계약이행 결과를 연결해 추가 확인이 필요한 사례를 추리는 방식이다. 자격증명서의 유효기간처럼 기준이 명확한 항목은 규칙에 따른 자동 대조를 병행할 수 있다.
분석에 앞서 등록정보의 정확성도 확보해야 한다. 직원 수가 실제 0명인 경우와 미입력된 경우를 구분하고, 주소·업종 변경 이력을 입찰 당시 정보와 대조해야 한다. AI가 선별한 업체에는 공급계약과 재고, 정비 협력체계 등 계약에 필요한 증빙을 확인하되, 등록정보를 정정하고 공급 능력을 소명할 절차도 보장해야 한다.
입찰보증금 부과와 AI 분석의 효과는 계약이행 결과로 평가해야 한다. 참여 업체 수가 줄어드는 데 그치지 않고 낙찰자가 정해진 품질과 납기를 지키며 하자 책임까지 이행하도록 관리해야 한다.
황 의원은 “AI를 활용하면 공급 능력이 없는 업체의 부적합 입찰을 사전에 걸러낼 수 있는 만큼, 부적절 사례를 검토하고 제한하는 행정 혁신이 필요하다”며 “입찰보증금 확대는 물론, 납품 권리만 파는 중개소식 입찰을 제한할 방법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Copyright ⓒ 뉴스로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