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황명열 기자]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에게 강요되어 온 역할과 사랑의 조건을 회화와 조각으로 살펴보는 전시가 열린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컷더케이크(Cut the Kake)는 노한솔 작가의 개인전 ‘필녀 릴리 畢女 莉莉’를 오는 11월 11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직접 쓴 소설을 바탕으로, 가족과 사회가 규정한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여성 개인이 지닌 삶과 감정의 가치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이번 전시의 출발점은 작가가 올해 직접 집필한 단편소설 ‘마칠 필, 계집 녀’(2026)다. 소설의 주인공 ‘필녀(畢女)’는 더 이상 딸을 낳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로 ‘여성을 끝낸다’는 이름을 얻은 넷째 딸이다. 오직 집안의 아들인 남동생 재근을 중심으로 모든 질서가 재편되는 가부장적 울타리 속에서 살아간다.
전시는 필녀의 유년기부터 중년기에 이르는 생애사적 궤적을 톺아보며 일상에 차갑게 스며든 성별에 따른 차별과 관습을 드러낸다. 노한솔 작가는 이러한 개인의 서사를 마중물 삼아 단순한 피해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모성과 여성성, 그리고 돌봄에 내재한 사회적 불평등과 무급 노동에 관한 넓은 차원의 담론으로 논의를 확장한다.
전시장의 핵심을 이루는 대표작 ‘피어나는 혹은 사그라드는 사랑’(2026)은 장지에 먹과 스프레이를 혼용하여 완성한 5폭 대형 회화다. 높이 162.2cm, 가로 120cm의 화폭 5개가 연이어 설치되어 전체 가로 길이가 6m에 이르는 이 대작은 미켈란젤로의 명작 ‘피에타’의 도상을 참조했다. 작가는 전통적인 성모자상의 구도를 변형하여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화면 중심에 둠으로써 숭고함과 애도, 돌봄의 의미를 새롭게 재조명한다.
보티첼리의 회화와 성모 마리아의 상징물을 변용한 ‘틀에 맞추기_석류의 마돈나’(2026)와 ‘필녀 릴리’(2026)에서도 서구 고전 미술의 거룩한 도상을 한국화의 채색 및 표현 기법과 결합한다. 작가는 기존 미술사적 도상이 지닌 권위와 질서를 해체하고, 신성시되거나 격하되어 온 여성 표상에 새로운 시선을 제안한다.
꽃과 식물, 요리와 돌봄 등을 다룬 서정적인 작품들은 거대 서사를 일상의 세밀한 영역으로 밀접하게 연결한다. 일본 전통 꽃꽂이 형식인 이케바나를 참조한 ‘드러나거나 혹은 날아가는 정의’(2026)는 인간의 시선에 의해 인위적으로 꺾이고 교정되는 식물의 형태를 통해 가부장제 아래 여성에게 가해지는 미적·사회적 억압을 은유한다.
또 물약통의 투약 표기, 보리차를 끓이는 반복적 과정, 레시피 등을 정갈하게 담아낸 소형 회화 시리즈는 그간 가정 내부의 영역에 숨겨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들의 반복적인 일상 노동과 돌봄의 실천을 당당히 미술의 주인공으로 소환해 낸다. 전시장 곳곳에 배열된 분홍색 실리콘 조각 ‘마음’(2026)은 타인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이를 끊임없이 수정하려는 유연한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노한솔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사회적 관습과 제도가 규정한 사랑과 역할의 단단한 틀을 뒤흔들고, 정형화된 이름으로는 다 설명될 수 없는 개인의 고유한 존재감과 생생한 감정을 재발견하도록 이끈다.
한편, 전시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까지 별도의 휴관일 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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