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세상을 떠난 배우 최불암이 생전 방송에서 공개한 청와대 전화 일화가 다시 화제를 모으고 있다. 1970년대 '수사반장'의 인기가 대통령 내외의 안방까지 닿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수화기 너머에서 그를 찾은 사람은 고(故) 육영수 여사였다.
최불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 뉴스1
배우 최불암은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지난 29일 오후 10시 30분께 숨을 거뒀다. 향년 87세. 고인은 지난해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거동이 불편해져 KBS 1TV '한국인의 밥상'에서 하차했고, 진행 바통은 배우 최수종이 이어받았다. 고인은 이후에도 재활 치료에 매달려 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건강 이상설은 올해 초부터 불거졌다. 배우 백일섭이 3월 한 방송에서 "불암이 형도 요즘 연락이 없고 전화도 안 받으신다"며 "제일 걱정되는 선배"라고 걱정을 내비치면서 우려가 커졌다. 최불암 측은 "허리가 조금 안 좋아서 재활에 집중하고 있는 정도"라고 해명했다. 지난 5월에는 MBC가 가정의 달 특집으로 고인의 연기 인생을 돌아보는 2부작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를 방송했지만, 고인은 재활 치료 때문에 직접 촬영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프리젠터는 1997년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 고인의 맏아들을 연기한 배우 박상원이 맡았다.
◆ "여보, 청와대 부속실에서 전화가 왔어"…1974년 어느 일요일
고인의 별세 소식과 함께 다시 소환된 장면은 2024년 4월 방송된 MBC '돌아온 레전드 수사반장'이다. 이 특집은 '수사반장' 프리퀄 드라마 '수사반장 1958' 방영을 앞두고 편성됐다. 박영한의 청년 시절을 맡은 배우 이제훈도 함께 출연해 최불암에게 직접 들은 일화를 전했다. 이 자리에서 최불암은 반세기 전 집으로 걸려 온 전화 한 통을 떠올렸다.
최불암은 "1974년도 일요일이었다. 집사람이 전화를 받더니 '여보 청와대 부속실에서 전화가 왔어'라고 하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수화기를 넘겨받은 그는 상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받아서 어정쩡하게 기다리는데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나 육영수예요'라고 그러더라. 벌떡 일어났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방송사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 영부인이 배우의 자택으로 직접 전화를 건 셈이다. 1974년은 '수사반장'이 첫 전파를 탄 지 4년째 되던 해다. 당시 '수사반장'은 매주 안방극장을 사로잡던 MBC의 간판 드라마였고, 박영한 반장을 연기한 최불암은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상태였다.
최고 시청률 70%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끈 드라마 '수사반장' / MBC
◆ 영부인의 질문 "담배를 몇 대를 태우세요?"
육 여사가 꺼낸 이야기는 뜻밖에도 드라마 속 흡연 장면이었다. 트렌치코트 차림에 담배를 문 박 반장의 모습은 '한국의 콜롬보'라는 별명을 낳을 만큼 '수사반장'의 상징과도 같았다.
육 여사는 최불암에게 "담배를 몇 대를 태우세요?"라고 물었다. 최불암이 "넉 대 태웁니다"라고 답하자 육 여사는 "아이고, 두 대로만 해요"라고 당부했다. 극 중 피우는 담배가 넉 대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절반으로 줄여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건강이었다. 최불암에 따르면 육 여사는 "옆에 계신 대통령께서 '수사반장'을 보며 넉 대를 따라 피운다"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이 TV로 '수사반장'을 보면서 박 반장이 담배에 불을 붙일 때마다 함께 담배를 피운다는 이야기였다. 남편의 흡연량을 걱정한 영부인이 드라마 주인공에게 직접 '금연 협조'를 요청한 셈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 놓인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영정 / 뉴스1
◆ 수화기 너머 들린 박정희 대통령의 한마디
통화는 박 전 대통령이 곁에 있는 자리에서 이뤄졌다. 최불암은 수화기 너머로 대통령의 목소리도 들렸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께서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그래'라고 하시더라"며 "그게 잊히지 않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아내의 '흡연 단속'에 머쓱해진 대통령의 반응이 반세기가 지나도록 배우의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육 여사는 이 통화가 있었던 해인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 도중 피격돼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최불암의 회고는 단순한 방송가 뒷이야기를 넘어 육 여사의 생전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화로도 회자돼 왔다.
최불암에게 담배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었다. 그는 박 반장의 흡연 장면을 두고 "담배도 연기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담배를 피우고 연기를 내뿜는 방식으로 인물의 감정을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 박 반장에서 김 회장으로…안방극장 지킨 '국민 아버지'
최불암의 본명은 최영한이다. 1959년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햄릿'으로 연기를 시작했고, 1967년 KBS를 거쳐 1969년 MBC 개국과 함께 안방극장에 자리를 잡았다.
대표작 '수사반장'은 1971년 3월부터 1989년 10월까지 18년 동안 880회가 방송됐다. 최고 시청률 70%를 넘긴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서 그는 강직하면서도 인간미 있는 형사 박영한을 연기하며 한국 수사극의 상징이 됐다. 35년 만인 2024년 이제훈 주연의 '수사반장 1958'이 제작됐을 때도 첫 회에 특별출연해 의미를 더했다.
배우 최불암 / 뉴스1
'수사반장'의 인기는 실제 경찰 조직으로도 이어졌다. 드라마 자문을 맡았던 최중락 전 총경은 '영원한 수사반장'으로 불렸다. 최불암은 '수사반장' 공로를 인정받아 경찰청으로부터 명예 경정에 이어 명예 총경으로 추대됐다. 2024년에는 명예 국가수사본부장(명예 치안정감)으로 위촉돼 우수 수사팀 특진 임용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1980년 10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1088회 방송된 MBC '전원일기'에서는 양촌리 김 회장으로 22년을 살았다. 가족과 마을을 묵묵히 지키는 가장의 모습은 그에게 '국민 아버지'라는 별칭을 안겼다. 이 밖에도 '제1공화국', '여명의 눈동자', '그대 그리고 나', '영웅시대' 등 굵직한 작품에 출연했다. 2014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연기 밖에서도 발자취를 남겼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의정 활동을 했고, 2011년부터는 '한국인의 밥상' 진행을 맡아 700회 넘게 전국 곳곳의 음식과 사람 이야기를 전했다. 1981년 '전원일기'의 아동 입양 에피소드를 계기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인연을 맺은 뒤 전국후원회장을 맡았다. 사단법인 제로캠프 이사장으로도 활동하며 소외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나눔에 앞장섰다. 2022년 이태원 참사 때는 초록우산 전국후원회장 자격으로 합동분향소를 찾아 어린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한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털어놓기도 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에 마련됐으며 30일 오전 10시부터 조문을 받고 있다. 상주로는 아내인 배우 김민자와 동녘 씨, 동비 씨 등 가족이 이름을 올렸다. 장례는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장으로 치러지며, 황영기 초록우산 회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발인은 11월 2일 오전 7시다. 여의도성당에서 염수정 추기경의 집전으로 장례 미사를 마친 뒤 경기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운구 행렬은 발인 당일 서울 중구 무교동의 초록우산 본부도 거친다.
배우 최불암 빈소 / 뉴스1
황영기 회장은 30일 빈소에서 취재진과 만나 지난주 병상을 찾았을 때의 일을 전했다. 그는 말을 잘 잇지 못하던 고인에게 초록우산장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며 "방송장이나 영화인장 등 여러 장이 가능한데 일부러 초록우산장을 말씀하셔서 굉장히 감사했다"고 말했다. 이어 고인이 생전 "항상 아이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며 그 마음을 끝까지 잊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고인의 비보에 추모도 이어지고 있다. 팝페라 테너 임형주는 30일 SNS에 "존경하고 사랑하는 최불암 이모부"라며 슬픔을 전했다. 빈소에는 '전원일기'에서 고인의 아들 역을 맡았던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김부겸 전 국무총리, 배우 나문희, 차인표 등이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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