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박정원 기자 = ‘국민 아버지’ ‘국민 배우’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으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온 대중의 사랑과 존경을 담아 바치는 이 숭고한 찬사가 가장 잘 어울렸던 거장들이 잇따라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해 11월 배우 이순재를 시작으로 올해 1월 안성기, 그리고 지난 29일 최불암까지. 불과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한국 대중문화의 기틀을 다지고 현대사를 몸소 살아낸 ‘큰 별’들이 하나둘 영면에 들면서, 연예계와 대중 매체 전반에 깊은 상실감과 함께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아쉬움이 짙게 물들고 있다.
세 거장이 한국 영상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감히 측정하기조차 어렵다. 이들의 연기 인생을 모두 합치면 200년이 훌쩍 넘는다. 공인된 기록으로만 이들이 출연한 영화와 TV 드라마는 670편(이순재 260여편, 안성기 140여편, 최불암 270여편) 이상이다.
여기에 연극 무대와 라디오, 장기 교양·예능 프로그램까지 더하면 세 배우가 평생에 걸쳐 국민과 나눠 온 작품 수는 1000편을 가볍게 웃돈다.
세 사람은 활동 영역도 연기 스타일도 달랐지만, 이름 석 자만으로 특정 시대의 희로애락을 떠올리게 하는 독보적인 존재들이었다.
지난해 11월25일 타계한 이순재는 마지막 순간까지 현역이었던 열정의 상징이었다. 1956년 연극으로 데뷔한 이래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무대와 안방극장을 오갔다.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엄한 아버지부터 MBC 드라마 <허준>의 유의태,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정감 어린 모습까지 시대를 맞춰 스스로를 변주했다.
80대에도 200분 분량의 연극 <리어왕>을 완벽히 소화해냈고, 90세가 넘는 나이에도 KBS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평생 시청자에게 신세 많이졌다”며 감사를 표해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안겼다.
지난 1월5일 영면에 든 안성기는 한국 영화의 ‘신뢰’ 그 자체였다. 1957년 8세의 나이로 영화 <황혼열차>의 아역 연기자로 데뷔해 10세이던 1959년 김기영 감독의 <10대의 반항>에서 소매치기 역으로 출연해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 소년연기상과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군을 전역한 이후에는 당시 아역 스타 출신은 성인 배우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고정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였지만, 이 같은 우려를 단번에 잠재울 만큼 성공적인 충무로 간판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배우 활동 기간인 69년간 170여편의 영화에 매진하며 한국 영화의 흥망성쇠를 함께했다. <만다라> <고래사냥>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실미도> <라디오스타> 등 한국 영화사의 이정표마다 그의 얼굴이 있었다.
오랜 세월 단 한 차례의 구설 없이 영화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던 그는 혈액암 투병 중에도 스크린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으며 끝까지 영화인으로 남았다.
최불암은 젊었을 때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다. 원래는 연출을 전공했지만 자기가 연출을 맡은 연극의 배우가 연기를 못하자 그 대타로 뛴 것이 연기 첫 시작이었다.
특히 1959년에 극단 ‘실험극회’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공연했을 때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당시 국내에서 ‘햄릿을 연기한 최연소 배우’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20대의 나이에는 드라마 <수양대군>에서 노년의 김종서 장군 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처음 이름을 알렸다. 이후 TV를 통해 전 국민의 일상과 함께 호흡한 ‘한국인의 얼굴’로 제대로 각인시킨 것은 MBC 드라마 <수사반장>이다. 그는 <수사반장>에서 박 반장으로 18년,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김 회장으로 22년을 살며 한국 사회의 정의와 따뜻한 공동체의 가치를 보여줬다.
연기 활동 외에도 지난 2011년부터 14년간 KBS1TV 교양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을 통해 전국의 소박한 삶과 사연을 보듬어온 그는, 우리 시대 가장 인자하고 강직한 ‘국민 아버지’의 묵직한 잔상을 남긴 채 전날(29일) 영면에 들었다. 향년 87세.
문화적 지주를 잃은 상실감은 비단 국내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 28일(현지시각) 할리우드에서는 영화 <엑스맨> 시리즈의 자비에 교수, <스타트렉>의 피카드 선장으로 전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영국 출신의 명배우 패트릭 스튜어트가 향년 86세로 별세했다.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핵심 멤버로 시작해 무대와 스크린을 넘나들며 품격 높은 연기를 선보였던 그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대배우였다. 동시대 전 세계 시청자와 관객들에게 삶의 이정표가 돼주었던 거장들이 국경을 넘어 같은 시기에 연달아 하늘의 별이 된 셈이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부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대중문화의 토대를 일궈낸 거장들. 이순재, 안성기, 최불암이 우리에게 남긴 수많은 작품과 따뜻한 웃음, 삶을 대하는 숭고한 태도는 단순한 필모그래피를 넘어 우리 사회가 함께 공유한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자 추억이다.
비록 무대 위 그들의 새로운 연기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지만, 이들이 수십년간 땀 흘려 남긴 작품들은 대중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재생될 것이다. 거장들이 떠난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늦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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