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원 칼럼] 감정 읽는 법을 배우는 시대④에 이어
[문화매거진=정규원 작가] 수업이 끝나고 교실 한쪽에 작품들이 걸린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그림 앞에 서서 말한다. “이 사람은 화난 것 같아.” 그림을 그린 아이는 고개를 젓는다. “졸린 건데.”
우스운 오해로 지나갈 수도 있는 짧은 대화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감정을 배우는 데 필요한 문제가 거의 다 들어 있다. 표현한 사람의 의도와 보는 사람의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것, 그 차이는 묻기 전까지 알 수 없다는 것, 설명을 들은 뒤에도 처음의 인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그때부터 작품은 혼자만의 것이면서 동시에 관계 속의 것이 된다. 누군가의 질문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하게 하고, 무심한 한마디가 오래 공들인 표현을 움츠러들게 만들기도 한다.
AI의 해석이 함께 제시되는 교실에서는 이 관계가 조금 더 복잡해진다. 친구 한 명의 의견과 매끄러운 문장으로 정리된 기계의 설명은 같은 무게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AI가 어떤 그림을 ‘억압된 분노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면, 그 말을 들은 아이와 교사는 원래 없던 징후까지 찾아보기 시작할지 모른다. 작품을 해석하는 말이 어느 순간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한 판단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필요하다. 그림에 날카로운 선이 있다는 관찰과 그림을 그린 아이가 공격적이라는 판단은 같은 말이 아니다. 어두운 배경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아이의 마음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다. 미술 시간에 표현할 자유를 주었다면, 그 표현 때문에 자신이 분류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함께 주어야 한다.
사진은 이러한 믿음과 판단의 문제를 살펴보기에 흥미로운 매체다. 무엇인가 실제로 있었던 장면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진 속 얼굴과 자세를 쉽게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카메라 앞의 모습은 연출될 수도 있고, 앞뒤의 순간을 잘라낸 결과일 수도 있다.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무제 영화 스틸 #21(Untitled Film Still #21)’에서 관객은 이야기의 일부처럼 보이는 장면을 만나지만 그 전체를 알 수는 없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이 사진이 행동과 행동 사이의 순간을 연출함으로써 서사의 불확실성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얼굴과 시선, 주변의 건물을 단서 삼아 이야기를 채워 넣는다.
이 사진을 보고 AI와 사람이 각자 설명을 써본다면 꽤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교육적으로 더 흥미로운 순간은 설명이 나온 다음이다. 사진에서 확인한 정보에 밑줄을 긋고, 상상으로 덧붙인 부분에는 다른 표시를 해보는 것이다. ‘인물이 화면 밖을 바라본다’는 관찰과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해석을 나란히 놓으면, 자신이 어느 지점에서 이야기를 만들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AI의 답을 비판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작업은 아니다. 사람도 익숙한 이야기에 기대어 타인을 읽는다. 조용한 아이는 소극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잘 웃는 아이는 고민이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 예술 이미지 앞에서 자신의 해석을 잠시 분해해보는 일이 실제 관계에서도 속도를 늦추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만 작품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공감 능력이 저절로 자란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어떤 질문을 나누고, 서로의 말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중요하다.
결국 다시 교실의 분위기로 돌아오게 된다. 다른 답을 말했을 때 비웃음을 받는 곳에서는 AI와 달리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다가 말을 바꿀 수 없는 곳에서는 처음의 답을 지키는 데 힘을 쓰게 된다. 감정 교육을 위한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그 시간을 둘러싼 관계가 허락하지 않으면 배움은 좁아진다.
공간 역시 그 관계에 참여한다. 모두가 정면을 향해 앉아 한 사람씩 발표하는 시간과, 작품 사이를 자유롭게 걸으며 둘씩 대화하는 시간에는 다른 말이 나온다. 작은 모서리와 비어 있는 벽, 잠시 앉을 수 있는 의자는 수업의 배경처럼 보이지만 참여하는 방법을 바꾼다.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날씨 프로젝트(The Weather Project)’는 공간 자체를 경험의 중심에 놓았던 설치미술이다. 반원형 스크린과 거울 천장, 인공 안개를 이용해 거대한 태양처럼 보이는 장면을 만들었고, 관객은 이동하며 그 장면과 그것을 구성한 장치를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을 감정 교육의 모범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다만 무엇을 느끼는가라는 질문이 빛과 거리, 몸의 위치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교실에서도 작은 시도는 가능하다. 학생들이 종이와 천, 사진을 이용해 머물고 싶은 장소를 함께 만든다고 해보자. AI는 스케치를 바탕으로 몇 가지 배치안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공간을 만들기 시작하면 화면에는 없던 문제가 생긴다. 한 아이에게 아늑한 가림막이 다른 아이에게는 답답하고, 누군가에게 적당한 밝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눈부시다.
여기에는 그림을 보고 감정을 맞힐 때와 다른 종류의 과제가 있다. 누가 옳은지를 정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가림막 일부를 열거나 조명의 방향을 돌리고, 서로 다른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자기 마음을 설명하는 말이 실제 공간을 바꾸는 결정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다른 사람이 편안해지기 위해 자신과 다른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AI가 학생들의 감정을 자동으로 추정해 공간을 조정하는 미래보다, 나는 학생들이 직접 선택하고 서로 협의하는 장면에 더 관심이 간다. 그 과정에서는 편안함이 개인의 느낌이면서 함께 마련해야 하는 조건이 된다. 감정 교육이 자기 내면을 살피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생활하는 방법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처음에 노란 웃는 얼굴을 그렸던 아이를 다시 떠올린다. 그 아이에게 더 정확한 감정 분류표를 보여주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웃고 있어도 즐겁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분류표의 단어를 더 많이 아는 것만으로 달라지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자기 표정을 설명할 수 있고, 듣는 사람은 그 설명 때문에 자신의 첫인상을 고칠 수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은 이미지와 말을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다. 미술은 그것들을 고르고 바꾸고 때로는 거절할 자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여전히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의 그림을 보고 처음에는 잘못 짐작했더라도, 대답을 들은 뒤 다시 바라봐주는 사람이다.
“아, 웃고 있지만 기쁜 얼굴은 아니었구나.”
그 말을 들은 아이는 노란 얼굴을 그대로 둘 수도 있고, 옆에 무언가를 더 그릴 수도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이제 그 그림을 혼자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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