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에는 여러 가지 말이 필요하다. 왜 떠나는지 묻고 싶고, 아직 남아 있는 마음을 전하고 싶으며, 한 번쯤은 돌아봐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마음이 말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낫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붙잡지 않는 것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배려가 되기도 한다.
김광진의 ‘편지’는 그런 이별을 노래한다. 화자는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대신 상대의 침묵을 받아들인다. 하지 못한 말은 가슴에 남겨두고,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별을 앞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기에는 담담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라고 하기에는 쓸쓸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진심이 있다. 사랑했던 사람과 더는 함께할 수 없더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 남긴 시간만큼은 부정하지 않는 마음이다.
노래 가사는 하오체로 쓰였다. 일상에서 자주 쓰이지 않는 말투는 감정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게 한다. 슬픔을 직접 호소하거나 상대를 원망하는 대신, 정중한 말씨로 이별을 받아들이는 화자의 태도가 드러난다. 말은 절제돼 있지만 마음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헤아리기 어려운 아픔이 전해진다.
이 노래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가사에 얽힌 사연이다.
작곡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했던 시절, 김광진은 연인이었던 한 여성과 교제했다. 그러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다. 여성은 다른 남성과 선을 보게 됐고, 김광진은 그 남성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상대는 집안이 좋고 인품도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김광진은 연인이 자신보다 그 남성과 함께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성은 다른 남성이 아닌 김광진을 선택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과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남성보다, 자신이 곁에 없을 때의 김광진을 더 걱정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선택받지 못한 남성은 유학을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아무런 답을 받지 못하자 그녀가 김광진을 선택했음을 알게 됐다. 그는 김광진을 따로 만나 편지 한 통을 건넨 뒤 홀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 편지의 내용을 다듬어 완성한 노래가 ‘편지’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흔히 생각하는 모습과 다르다. 노래를 부르는 김광진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쓴 편지처럼 느껴지지만, 알려진 사연 속 편지의 주인은 다른 남성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성이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두 사람의 앞날을 위해 물러난 사람의 글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아픈 일이다. 특히 자신의 마음이 상대에게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는 더 그렇다. 사랑의 크기를 증명하고 싶고, 함께했던 시간을 이유로 상대의 마음을 돌리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편지의 주인은 자신이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상대의 결정을 바꾸려 애쓰기보다 그 선택을 존중하는 길을 택한다.
그의 작별에는 원망보다 배려가 앞선다.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탓하지 않고, 떠나는 사람의 행복을 빈다. 사랑이 반드시 함께하는 관계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면, 이별은 상대를 향한 마지막 마음을 전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사랑했던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일과 그 사람 곁에 남는 일은 언제나 같은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를 놓아준다는 말이 아픔까지 쉽게 정리된다는 뜻은 아니다. 보내기로 결정한 뒤에도 그리움은 남고, 마음을 접었다고 해서 함께했던 기억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편지’의 화자가 이별을 받아들이면서도 함께한 시간에 감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관계는 끝날 수 있지만, 그 관계가 한 사람의 삶에 남긴 의미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별을 기억한다. 어떤 사람은 마지막으로 나눈 말을 오래 붙들고, 어떤 사람은 끝내 듣지 못한 대답을 마음속에서 되풀이한다. 또 어떤 사람은 더는 연락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한다. ‘편지’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답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상대의 침묵을 받아들이고, 함께했던 시간을 감사로 남겨두는 사람의 마음을 들려준다.
이 노래가 오랫동안 사랑받은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별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에 겹쳐 놓을 수 있다. 끝내 전하지 못한 말, 붙잡고 싶었지만 놓아야 했던 사람, 미워하기보다 잘 지내기를 바랐던 기억이 가사에 스며든다. 노래 속 사연을 알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남은 사람을 떠올릴 수 있고, 사연을 알고 난 뒤에는 담담한 문장 하나하나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노래의 배경을 알고 나면 감상의 방향도 달라진다. 김광진의 개인적인 이별 고백으로 들리던 노래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을 존중하고, 그 선택 앞에서 물러난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사랑은 두 사람의 마음이 일치할 때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선택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편지’는 떠나는 사람의 노래이면서 남겨진 사람의 노래이기도 하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슬픔을 담고 있지만, 그 슬픔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고, 함께했던 시간에 감사하며, 앞으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이 노래 전반에 담겨 있다.
이렇듯 살다 보면 끝까지 곁에 머무는 것만이 사랑의 증거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관계는 이어지지 못하고, 어떤 마음은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은 채 남는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억은 관계가 끝난 뒤에도 삶의 일부로 남는다.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된 ‘편지’는 그렇게 작별을 다른 감성으로 들려준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한 슬픔보다 그 사람의 앞날을 빌어주는 마음을, 사랑을 잃었다는 상실보다 사랑했던 시간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 어쩌면 이 노래가 우리에게 오래 남기는 것은 이별을 잘하는 방법이 아닐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을 자신의 곁에 두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복을 바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보내는 마음에도 진심이 깃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김광진의 음악은 새로운 시간을 향해 이어지고 있다. 11월 11일 약 9년 만의 신곡을 발표한다. 밝고 경쾌한 리듬을 바탕으로 기존에 들려준 음악과는 다른 분위기를 담을 예정이다. 오랜 시간 김광진의 노래를 기억해 온 관객에게는 익숙한 음악 세계와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함께 만나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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