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포커스] 전시실을 떠난 현대미술, 티노 세갈이 제주에서 시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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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포커스] 전시실을 떠난 현대미술, 티노 세갈이 제주에서 시도하는 것

뉴스컬처 2026-10-27 16:14: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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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미술 작품은 캔버스와 조각, 설치물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말과 움직임, 예측하지 못한 만남도 예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현대미술가 티노 세갈(Tino Sehgal)은 물리적인 결과물을 남기는 관행에서 벗어나 인간의 행동과 상호작용을 예술의 형식으로 다뤄 왔다. 그의 작업에서 관객은 완성된 작품을 바라보는 외부인이 아니라 작품이 성립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세갈이 제주에서 시도하는 20시간 체류형 참여 프로그램은 작업의 특성을 미술관 밖으로 확장한다. 전시실 대신 숲과 정원이 있는 자연환경을 활용하고, 관객이 일정 시간 머물며 작품의 해석자(Interpreter)와 마주하도록 구성했다. 작품을 찾아 감상하는 익숙한 관람 방식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행동과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예술을 경험하게 하는 기획이다.

프로그램은 미술관 중심의 관람 방식에서 벗어나 예술의 장소와 시간, 관객의 역할을 새롭게 제시한다. 작품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참여자가 경험을 구성하는 방식은 현대미술에서 관객과 작품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

■물질을 남기지 않는 예술, 미술의 소유 관행에 대한 도전

티노 세갈. 사진=타라카 제주
티노 세갈. 사진=타라카 제주

현대미술에서 작품은 수집과 보존, 전시를 통해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미술관은 작품을 소장하고 연구하며 관객에게 공개하는 제도적 기반이다. 작품의 물리적 형태는 창작 활동을 기록하고 미술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세갈의 작업은 이 관행과 다른 방향을 취한다. 그의 작품은 사람의 행동과 대화,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구현되며 물질적인 결과물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이나 영상 기록을 통해 작품을 보존하는 일반적인 전시 관행과도 거리를 둔다. 관객이 경험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형태로 전달되기 어렵고, 작품은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만남을 통해 구현된다.

여기에는 예술의 가치가 형성되는 방식에 관한 문제가 놓여 있다. 작품을 소유하고 보존하는 일과 작품을 직접 경험하는 일은 다르다. 세갈은 후자에 무게를 두면서 예술을 물건의 형태로만 이해하는 관점을 흔든다. 작품을 구매하거나 소장할 수 없더라도 예술적 경험은 성립할 수 있으며, 관객의 참여는 감상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활동이 아니라 작업을 구성하는 조건이 된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작품이나 미술관의 기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갈의 작업은 기존 예술 형식을 대체하기보다 미술 제도가 충분히 포괄하지 못했던 경험의 영역을 부각한다. 작품을 보존하는 일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 경험을 기억하는 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의 작업은 관객이 그 차이를 직접 체감하도록 만든다.

세갈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런던 테이트모던 등 주요 미술 기관에서 작품을 소개해 왔다. 한국에서는 2026년 3월 3일부터 6월 28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에서 소개된 그의 작업은 제주에서 자연환경과 장시간 체류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관객은 작품을 구성하는 참여자가 된다

세갈의 작품에서 관객은 정해진 정보를 전달받는 데 머물지 않는다. 작품의 해석자와 마주치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경험에 관여한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반응은 다를 수 있다. 참여자의 말과 행동이 달라지면 만남의 양상도 달라진다. 작품은 미리 완성된 형태로 관객 앞에 놓이기보다 사람 사이에서 구체적인 경험으로 나타난다.

이 같은 참여 방식은 관객의 역할에 관한 미술계의 논의와 맞닿아 있다. 전통적인 관람 환경에서 관객은 작품을 바라보고 의미를 해석하는 사람으로 설정된다. 참여형 작업에서는 관객의 행동과 선택이 작품을 경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작품과 관객의 관계가 일방적인 감상에서 상호작용으로 넓어지는 것이다.

다만 관객 참여가 늘어날수록 예술이 자동으로 민주적이거나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규칙을 누가 정하는지, 참여자는 어느 범위까지 선택할 수 있는지, 해석자의 역할은 어떻게 설정되는지에 따라 경험의 성격은 달라진다. 관객이 작품의 일부가 된다는 설명만으로 작가와 참여자 사이의 권한이 동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제주에서도 작품의 해석자와 참가자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지가 중요하다. 예고 없이 마주치는 만남은 관객에게 계획된 관람과 다른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반면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개인마다 다르다. 참여 예술의 성과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수식어보다 실제로 관객에게 어떤 선택과 반응의 기회가 주어지는지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

■미술관 밖의 자연, 예술 경험의 조건을 바꾸다

제주 프로그램은 정해진 전시실 대신 숲과 정원을 주요 환경으로 활용한다. 참가자는 자연 속을 걷고 휴식을 취하다 작품의 해석자를 만난다. 전시실에 들어서 작품을 찾아가는 방식과 달리, 일상적인 활동을 이어가는 도중 예술과 접촉하게 된다.

자연환경은 미술관과 다른 조건을 제공한다. 실내 전시 공간은 작품을 집중해서 감상하도록 환경을 통제하고, 관람 동선과 조명, 작품 간 거리를 조절할 수 있다. 반면 야외에서는 날씨와 주변 소리, 시간대에 따른 빛의 변화가 경험에 개입한다. 참가자의 이동과 휴식도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자연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사실만으로 예술과 자연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야외 조각과 장소 특정적 미술 역시 오랫동안 자연환경과 작품의 관계를 다뤄 왔다. 세갈의 프로그램에서 차별화되는 부분은 물리적인 작품을 자연 속에 설치하는 대신 사람의 행동과 만남을 중심으로 경험을 구성한다는 데 있다.

숲과 정원은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참가자가 걷고 머무는 동안 경험의 조건을 형성한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자연을 바라보는 것과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타인과 예술적으로 만나는 것은 서로 다른 경험이다. 전자가 작품을 중심으로 환경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주변 환경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경험이 형성되는 방식에 가깝다.

자연환경을 활용하는 프로그램도 장소를 선택하고 참여 방식을 설계하는 기획자의 판단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술관의 제도적 장치가 사라지는 대신 체류 공간과 프로그램 운영 방식이 새로운 조건으로 작동한다. 제주라는 장소가 예술 경험에 부여하는 의미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보다 실제 참여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다.

■20시간의 체류, 예술과 웰니스의 접점

프로그램은 20시간 체류를 바탕으로 운영된다. 참가자는 짧은 관람을 마치고 전시장을 떠나는 대신 일정 시간 동안 한 장소에 머물며 자연과 사람을 경험한다. 여기에 고전문헌학자 배철현 교수의 인문학 강의와 라이프 아티스트 이효재가 기획한 제주 자연 밥상 다이닝이 더해진다.

미술과 인문학, 식문화, 휴식을 함께 구성한 방식은 문화예술 경험이 전시 관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관객은 작품을 보는 시간뿐 아니라 머무는 장소와 식사, 대화, 휴식을 포함한 체류 전반을 경험하게 된다. 예술 프로그램이 여행과 웰니스 산업의 형식과 만나는 사례로도 볼 수 있다.

예술을 통한 자기 성찰과 휴식은 서로 연결될 수 있지만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미술 작품을 경험하는 일이 반드시 심리적 안정이나 치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웰니스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해서 예술적 경험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두 영역을 함께 구성했다면 각 활동이 어떤 목적을 갖고 참가자의 경험에 기여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장시간 체류는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 가능성과 함께 참여자의 시간과 비용 부담을 수반한다. 프로그램의 접근성, 참가자에게 요구되는 참여 수준, 휴식과 활동의 배분도 체류형 예술을 평가할 때 살펴볼 조건이다. 작가의 명성과 장소의 특별함만으로 프로그램의 문화적 가치를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다.

제주 프로그램은 반려동물 동반도 가능하도록 마련됐다.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참가자에게 자연 속 체류와 문화예술 경험을 함께 제공한다는 취지다. 이는 예술 프로그램이 누구를 참여자로 상정하는지, 일상의 생활 조건을 얼마나 고려하는지에 관한 문제와도 연결된다.

■관람을 넘어 참여로, 예술의 범위를 넓히는 시도

사진=타라카 제주
사진=타라카 제주

티노 세갈의 제주 프로그램은 인간의 행동과 상호작용을 중시해 온 작가의 작업을 자연 속 체류와 결합한다. 미술관 밖에서 예술을 경험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관람 방식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참여 예술이 장소와 시간, 관객의 역할을 어떻게 새롭게 구성하는지 살펴볼 기회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의 변화는 전시 공간을 옮기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관객이 어떤 역할을 맡는지,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지, 참여자에게 어느 정도의 선택권이 주어지는지가 함께 검토돼야 한다. 자연환경과 웰니스 프로그램을 결합한 기획 역시 예술적 경험과 휴식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때 의미를 얻는다.

프로그램은 10월 30일부터 11월 29일까지 제주 서귀포시 색달동의 타라카 제주에서 진행된다. 한 달간 운영되는 일정 속에서 참가자는 20시간 체류 프로그램을 통해 세갈의 참여 예술을 경험하게 된다.

작품이 남기는 물질적 흔적보다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험을 중시하는 세갈의 작업은 예술의 범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제주에서의 시도는 관객과 작품, 자연환경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익숙한 관람 방식 바깥에서 예술을 경험하는 조건을 시험하며, 미술관과 작품을 중심으로 형성돼 온 현대미술의 관행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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