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복싱 경기에서 선수가 쓰러지면 심판은 숫자를 센다. 카운트는 승패를 결정하기 위한 규칙인 동시에 선수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주어지는 짧은 시간이다. 숫자가 이어지는 동안 선수는 몸을 추스르고, 일어설 것인지 경기를 포기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선승훈의 안무작 'COUNT'는 이 짧은 순간에 주목한다. 쓰러짐과 일어섬이 반복되는 복싱의 상황을 빌려 인간이 삶의 무게를 견디고 다시 움직이는 과정을 무대 위에 펼친다.
작품에서 정해진 규칙 안에서 상대와 맞서고, 충격을 견디며, 자신의 몸을 통제해야 하는 복서의 모습은 예측하기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맞닿는다. 준비를 마쳤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획이 어긋나고 몸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사람은 다음 동작을 이어가야 한다. 'COUNT'는 이 과정을 춤으로 옮기며 삶의 지속을 신체의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작품은 '시작-반복-충돌-지속'이라는 네 개의 장으로 이뤄진다. 시합을 앞둔 복서의 준비와 호흡에서 시작해 상대와 부딪히는 움직임, 반복되는 스텝, 멈춤 이후의 재동작으로 이어진다. 각 장은 복싱 경기의 진행을 따라가면서도 일상에서 겪는 긴장과 권태, 예기치 않은 변화와 회복을 연상시킨다. 몸이 움직이는 방식의 변화가 시간의 경과와 심리적 압박을 드러내는 셈이다.
복싱에서 발놀림은 공격과 방어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 기술이다. 상대와의 거리를 조절하고 충격을 피하며 다음 동작을 준비하려면 끊임없이 발을 움직여야 한다. 'COUNT'에서 복싱 스텝은 무용수의 신체를 움직이는 주요한 재료가 된다. 서로 몸을 맞대고 밀어내는 동작은 점차 속도와 강도를 높이고, 반복되는 발놀림은 치열한 움직임으로 확장된다.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 집중하는 복싱의 목적과 달리 작품은 부딪힘 이후에도 움직임을 이어가는 몸에 무게를 둔다.
여기서 반복은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복서에게 반복 훈련은 몸에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며, 경기 중 되풀이하는 스텝은 다음 움직임을 준비하는 방법이다. 작품에서도 무용수들은 비슷한 동작을 거듭하면서 속도와 힘을 달리한다. 같은 동작이라도 호흡이 가빠지고 신체의 피로가 쌓이면 수행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몸이 겪는 변화가 드러나면서 권태와 긴장, 버티려는 의지가 함께 나타난다.
특히 작품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해야 할 결함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상하지 못한 충돌을 겪고, 익숙한 방식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순간을 지나면서도 사람은 다시 자신의 몸을 움직인다. 'COUNT'에서 멈춤은 움직임의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숨을 고르고 발을 다시 내딛는 과정은 다음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이다. 회복은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결과가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 거듭되면서 이어진다.
음악은 이 과정을 구체적인 리듬으로 만든다. 작곡가 김관우는 동살풀이·자진모리·휘모리 등 한국 전통 장단에 아프리카 계열 타악 리듬을 결합해 복싱의 속도와 긴장감을 표현한다. 장구·징·꽹과리는 움직임의 강약을 강조하고, 전자음악은 무대의 소리를 현대적으로 확장한다. 전통 장단의 리듬감과 복싱 경기의 타격감이 만나는 가운데 무용수의 동작은 음악과 별개로 진행되지 않고 서로 반응하며 변화를 만들어낸다.
한국 전통 장단은 일정한 박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장단마다 지닌 속도와 강약, 맺고 푸는 방식은 춤과 음악이 호흡을 주고받는 토대가 된다. 동살풀이와 자진모리, 휘모리처럼 서로 다른 장단이 이어지면 신체가 움직일 수 있는 속도와 긴장감도 달라진다. 'COUNT'는 이러한 전통 장단을 복싱의 스텝과 타격에 연결한다. 한국춤에서 축적된 리듬의 감각을 오늘날 관객에게 익숙한 스포츠의 신체 언어와 결합해 새로운 움직임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거문고의 활용도 눈여겨볼 만하다. 작곡가는 현을 강하게 뜯거나 타격해 복싱의 펀치와 발을 내딛는 순간의 힘을 소리로 나타낸다. 전통 악기의 음색을 고유한 연주 방식에만 한정하지 않고, 신체의 충격과 운동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여기에 무용수의 호흡과 발소리가 더해진다. 별도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뿐 아니라 몸 자체에서 발생하는 소리까지 음악의 일부가 되면서 무대는 움직임과 청각적 자극이 맞물리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장구 라이브 연주 역시 무용수의 신체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복서가 손을 보호하기 위해 핸드랩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 과정에 연주가 반응하며, 소리는 몸의 움직임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음악이 완성된 춤에 배경으로 덧붙는 방식이 아니라 연주와 신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다. 발소리와 호흡, 타악기의 울림이 겹치는 가운데 관객은 무용수의 움직임뿐 아니라 몸이 움직이는 데 필요한 힘과 긴장까지 청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안무가 선승훈은 2024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해 '귀향', '탈바꿈' 등 다양한 작품을 소화해 왔다. 2023년 서울무용제 댄스랩에서는 '우리는 이미'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무용수로서 쌓은 경험을 창작으로 확장하는 'COUNT'는 한국춤의 리듬과 현대적인 신체 움직임을 결합해 동시대의 감각을 탐색한다. 국립무용단의 '안무가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창작의 다양성 속에서 복싱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전통춤의 표현 가능성을 넓히려는 시도다.
'COUNT'가 주목하는 것은 승리의 결과보다 다시 움직이기까지의 과정이다. 쓰러진 선수가 일어난다고 해서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몸을 추스르고 다음 동작을 준비하는 행위는 경기를 이어가기 위한 조건이 된다. 작품은 이를 삶의 모습에 빗대어 불완전함과 흔들림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만들어가는 인간을 그린다.
무용수의 발소리와 호흡, 장단의 반복이 맞물리며 카운트는 경기의 규칙을 넘어 삶을 지속하게 하는 리듬으로 확장된다. 멈춤과 재도약을 거듭하는 몸을 통해 선승훈은 흔들림을 피하는 대신 이를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