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뼈와 고기를 오래 끓여 만든 설렁탕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국물 음식이다. 뽀얀 국물에 밥을 말고 소금과 대파로 간을 맞춰 먹는 방식은 오늘날에도 사랑받고 있다.
이처럼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이지만, 설렁탕 한 그릇에는 오랜 역사와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름의 유래부터 100년 전 서울의 배달 문화,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시행했던 정부 정책까지 설렁탕과 얽힌 이야기를 살펴봤다.
설렁탕 이름에 얽힌 이야기
설렁탕의 이름과 유래에는 크게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시대 선농단에서 시작됐다는 설이다. 선농단은 왕이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던 장소다. 제사를 마친 왕이 백성들에게 소고기를 끓인 국과 밥을 나눠줬으며, 당시 음식을 '선농탕'이라고 부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설렁탕'으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두 번째는 고려시대 몽골에서 전해졌다는 설이다. 몽골에는 고기를 물에 넣고 오래 끓여 먹는 음식 문화가 있었다. 이러한 조리법이 고려에 전해지면서 소고기 국물 음식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몽골어에서 고기 국물을 뜻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슐루' 또는 '수루'라는 말이 설렁탕의 이름과 관련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세 번째는 국물을 끓이는 모습이나 소리에서 이름이 생겨났다는 설이다. 소고기와 뼈를 오래 끓이면 국물이 뽀얗게 변하는데, 눈처럼 흰 국물의 모습에서 이름이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고기를 끓일 때 나는 소리에서 이름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설렁탕은 뽀얗고 곰탕은 맑다? 재료와 조리법의 차이
설렁탕과 곰탕은 모두 소고기를 오래 끓여 만드는 국물 음식이다. 밥을 곁들이고 소금이나 대파로 간을 맞춰 먹는 방식도 비슷하다. 하지만 재료와 국물을 내는 과정에서는 차이가 있다.
설렁탕은 사골과 잡뼈, 머리고기, 양지 등 소의 여러 부위를 함께 끓인다. 뼈를 오랫동안 고아내면 국물에 지방과 단백질 등이 퍼지면서 뽀얀 색을 띠게 된다.식당에 따라 사골을 여러 차례 끓이거나 고기와 뼈를 따로 삶아 국물을 섞기도 한다. 오래 우려낸 국물에서는 깊고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반면 곰탕은 주로 양지와 사태 같은 살코기를 오래 끓여 국물을 낸다. 고기에서 우러난 맛과 향이 국물에 배어 담백하고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국물은 비교적 맑은 편이며, 삶은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담아낸다. 소의 위 부위인 양이나 곱창 등 내장을 넣어 씹는 맛을 더하기도 한다.
설렁탕에 소면이 들어간 이유
설렁탕을 주문하면 뽀얀 국물 속에 소면이 함께 담겨 나오는 경우가 많다. 밥을 말아 먹는 음식에 밀가루로 만든 면까지 들어가는 데에는 과거 정부의 식량 정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1960~1970년대 한국은 쌀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정부는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보리 등 잡곡을 섞어 먹는 '혼식'과 밀가루 음식을 먹는 '분식'을 장려했다. 이를 '혼분식 장려운동'이라고 불렀다.
당시 정부 정책은 가정뿐 아니라 음식점에도 적용됐다. 1964년 1월부터는 음식점에서 보리와 면류를 일정 비율 이상 섞어 판매하도록 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육개장과 곰탕, 설렁탕 등 국물 음식에 쌀 50%, 잡곡 25%, 면류 25%를 섞도록 지시했다. 설렁탕에 밥과 함께 면을 넣어 판매하도록 했다.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한 정책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1969년에는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로 정하고 일정 시간 동안 쌀로 만든 음식의 판매를 제한했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도시락에 잡곡이 들어 있는지 검사했다.
혼분식 규제는 1977년 쌀 자급이 이뤄지면서 크게 완화됐다. 이후 밀가루 음식은 하나의 식문화로 자리 잡았고, 설렁탕에 소면을 곁들이는 방식도 이어졌다.
100년 전에도 배달해 먹던 설렁탕
설렁탕이 서울의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은 시기는 20세기 초다. 서울에 음식점이 늘어나면서 집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밥과 국, 고기를 한 그릇에 담아 먹을 수 있는 설렁탕은 든든한 한 끼로 사랑받았다.
1920년대에는 설렁탕을 집으로 배달해 먹는 문화도 발달했다. 당시 배달원들은 자전거를 타고 서울 거리를 다니며 설렁탕과 냉면 등의 음식을 날랐다. 1929년 발행된 잡지 '별건곤'에는 신혼부부가 아침에 설렁탕을 주문하고 저녁에도 음식을 사다 먹는 생활상이 소개됐다. 100년 전에도 집에서 설렁탕을 주문해 먹는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울에는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설렁탕집이 지금도 남아 있다. 종로구의 '이문설농탕'은 1904년 '이문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울미래유산에도 선정됐다.
중구의 '잼배옥' 역시 1933년 문을 연 오래된 설렁탕집이다. 오랜 세월 서울 도심에서 영업을 이어온 두 식당은 설렁탕이 시민들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자리 잡았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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