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드인데 3시간 내내 뜨거웠다…잔나비가 빚어낸 가을밤의 마법[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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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드인데 3시간 내내 뜨거웠다…잔나비가 빚어낸 가을밤의 마법[리뷰]

이데일리 2026-10-24 15:30:5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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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윤기백 기자] 발라드가 이렇게 뜨거울 수 있을까. 잔잔한 선율에 귀를 기울이다 어느새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추억에 잠겼다가 다시 환호성을 터뜨렸다.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고, 때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몸으로 음악을 즐겼다. 잔나비의 첫 발라드 콘서트는 조용한 음악이 결코 작은 감동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무대였다. 서정적인 노랫말과 풍성한 밴드 사운드, 관객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3시간여의 공연은 제목 그대로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완성했다.

잔나비(사진=페포니뮤직)
잔나비(사진=페포니뮤직)


◇가을 감성 충만한 오프닝…첫 곡부터 뜨거운 합창

23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KSPO DOME)에서 열린 잔나비 발라드 컬렉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시작부터 특별했다. 공연 전 흘러나온 음악부터 잔나비다운 재치가 묻어났다. 1990년대를 풍미한 밴드 빛과 소금의 ‘오래된 친구’였다. 원곡에서 두 멤버 박성식과 장기호를 부르는 ‘미스터 박·미스터 장’을 잔나비 최정훈과 김도형의 이름을 딴 ‘미스터 최·미스터 김’으로 바꿔 들려줬다. 오랜 시간 음악을 함께 만들어온 두 사람의 우정을 표현한 듯한 유쾌한 오프닝이었다.

노래가 끝날 무렵 객석의 조명이 꺼지자 관객들의 손목밴드에서 주황빛이 일제히 피어올랐다. 이윽고 공연장 중앙 무대가 서서히 솟아오르고 장막이 걷혔다. 가을을 닮은 차분한 색감의 의상을 입은 최정훈과 김도형이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에서는 환호가 터졌다.

첫 곡은 ‘꿈과 책과 힘과 벽’이었다. 무대에 앉아 핸드마이크를 쥔 최정훈은 담담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뒤편에는 레트로 감성의 흑백 애니메이션이 펼쳐졌다. 무대를 천천히 거닐며 관객과 눈을 맞추던 그는 익숙한 후렴을 객석으로 넘겼다.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보탰다. 수많은 목소리가 하나로 모여 공연장을 채웠고, 최정훈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노래를 이어갔다. 첫 곡부터 가수와 관객의 경계가 허물어진 순간이었다.

잔나비(사진=페포니뮤직)
잔나비(사진=페포니뮤직)


이어진 ‘나의 기쁨 나의 노래’에서는 한층 따뜻한 장면이 펼쳐졌다. 핀 조명 아래 노래하던 최정훈이 후렴구를 관객에게 맡기자 공연장 전체가 거대한 합창단으로 변했다. 노래가 끝난 뒤 쏟아지는 박수에 주먹을 힘껏 들어 올리는 그의 모습에서는 무대 위 여유도 느껴졌다. ‘투게더!’에서는 분위기가 반전됐다. 얼굴을 클로즈업한 영상과 함께 힘찬 카운트가 울려 퍼지자 축포가 터졌다. 관객들은 일제히 박수로 화답했다. 최정훈은 “오늘이 정말 기대됐어요”라며 설렘을 드러냈다.

‘한걸음’과 ‘돌마로’에서는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가 더욱 좁혀졌다. 스탠드 마이크를 들고 무대 아래로 내려온 최정훈은 공연장 곳곳을 누비며 호응을 이끌었다. 중앙 무대 반대편까지 걸어가고, 기타를 연주하는 김도형을 향해 손으로 물결을 만들며 장난스럽게 교감했다. 객석에서도 같은 동작이 이어졌다. 공연장이 하나의 거대한 놀이터가 된 듯했다.

잔나비는 이날 공연을 여러 장(章)으로 나눠 하나의 이야기처럼 풀어냈다. ‘그 밤 그 밤’에서는 마치 작은 재즈클럽에 들어선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소란한 밤을 지나’에서는 박수와 합창으로 관객을 음악 속에 끌어들였다. 중앙 무대는 턴테이블처럼 회전하며 어느 좌석에서도 잔나비의 표정과 몸짓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게 했다.

최정훈은 “케이스포돔에서는 두 번째 공연이고, 발라드 콘서트는 처음”이라며 “잔나비가 조용하게 공연하는 친구들이 아니냐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어 그렇게 준비해봤다”고 말했다. 이어 “어느 공연보다 가까운 공연이 될 것”이라며 즉흥적인 요소도 예고했다.

잔나비(사진=페포니뮤직)
잔나비(사진=페포니뮤직)


◇추억·가족·이별까지…눈물로 물든 잔나비의 음악

실제로 무대에는 잘 짜인 연출과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이 공존했다. ‘첫사랑은 안녕히-’에서는 회전하는 무대 위로 아련한 선율이 흐르며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너에게 난 나에게 넌’에서는 영상과 함께 최정훈과 김도형의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노래와 연주에 귀를 기울이며 음악을 즐겼다.

‘초록을거머쥔우리는’에서는 공연장 전체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최정훈은 노랫말에 10월의 계절감을 담아 즉석에서 가사를 바꾸는 여유를 보였다. 이어진 ‘쉬’(SHE)에서는 중앙 무대가 구름 위에 떠오른 듯 높이 솟아올랐다. 관객들이 익숙한 선율을 합창하자 최정훈은 마이크를 두 손으로 곱게 내밀었다. 노래가 끝난 뒤에는 “너무 듣고 싶은 목소리였어요”라며 관객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아시아 투어를 마친 소감도 전했다. 최정훈은 “오랜 시간 잔나비를 사랑해준 팬들 덕분에 행복한 순간들을 보냈다”며 “앞으로 더욱 멋진 음악을 들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은 이날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진심처럼 들렸다.

‘나는 볼 수 없던 이야기’에서는 애틋한 감성이 객석을 적셨다. 공연을 지켜보던 배우 박준면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굿나잇’에서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으로 이어지는 무대에서는 미러볼이 반짝이며 공연장을 낭만적인 재즈클럽으로 바꿔놓았다. 최정훈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풍성한 악기 사운드가 더해지자 음악의 감정도 절정으로 치달았다.

잔나비 최정훈(사진=박준면 SNS)
잔나비 최정훈(사진=박준면 SNS)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는 보컬의 폭발력에 맞춰 축포와 꽃가루가 쏟아졌다. 음악의 강약과 조명, 무대 장치가 치밀하게 맞물리며 듣는 즐거움에 보는 즐거움까지 더했다.

압권은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였다. 푸른 달빛을 연상시키는 조명 아래 최정훈이 노래를 시작하자 객석에서는 은은한 합창이 퍼졌다. 이내 수많은 관객이 휴대전화 불빛을 밝히면서 공연장 전체가 별이 가득한 밤하늘로 변했다. 거창한 장치 없이도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낸 것은 결국 관객이었다. 김도형은 “발라드가 잔잔해 보여도 그 안에는 뜨거운 게 있다”고 말했다. 이날 무대가 보여준 감동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었다.

공연 중반부에는 더욱 사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늙은 개’ 무대에 앞서 최정훈은 오랫동안 함께한 반려견 나나가 올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잔나비의 반려견답게 ‘바나나’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반려견의 생전 모습이 화면에 등장했다. 두 사람은 통기타를 앞세워 담백하게 노래를 풀어냈다. 화려한 무대 장치도, 큰 몸짓도 필요 없었다. 음악에 담긴 추억만으로 객석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여름가을겨울 봄’에서는 김도형의 통기타 연주와 최정훈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한 편의 시를 듣는 듯한 감흥을 안겼다. ‘마더’에서는 객석에 자리한 어머니를 화면에 비추는 연출로 특별한 감동을 더했다. 이어진 ‘슬픔이여 안녕’에서는 관객들이 후반부 노래를 사실상 도맡아 부를 정도로 뜨거운 합창이 펼쳐졌다. 노래가 끝난 뒤에도 꽃가루가 다시 쏟아지며 무대의 여운을 이어갔다.

잔나비와 구닥다리 영웅들(사진=페포니뮤직)
잔나비와 구닥다리 영웅들(사진=페포니뮤직)


◇발라드의 반전…록페 못지않은 뜨거운 피날레

공연 후반부에 접어들자 잔나비 특유의 자유분방한 에너지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다. ‘뷰티풀’에서는 최정훈이 기타를 메고 2층 객석으로 향했다. 관객 가까이에서 직접 노래하며 공연장을 누볐다. 김도형의 할머니를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정겨운 장면도 있었다. 준비된 무대 위에서만 만날 수 없는, 라이브 공연 특유의 재미가 살아났다.

오랜 팬들을 위한 깜짝 선물도 이어졌다. 즉석에서 신청곡을 받는가 하면 팬덤 ‘구닥다리’와 함께 추억을 나눴다. ‘얼마나 좋아’와 ‘쿠쿠’에서는 경쾌한 리듬과 신시사이저 사운드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최정훈의 재치 있는 표정과 연기, 객석의 떼창이 어우러지며 공연장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실시간 메들리는 발라드 콘서트라는 이름을 잠시 잊게 한 순간이었다.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짧지 않은 우리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자꾸 내 마음을 가둬두네’를 시작으로 ‘봉춤을 추네’, ‘로켓트’ 등 신나는 곡들이 이어지자 붉은 조명이 공연장을 뒤덮었다. 특히 ‘봉춤을 추네’에서는 최정훈이 직접 봉춤을 선보이며 흥을 폭발시켰다. 김도형 역시 화려한 기타 연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잔잔하게 출발한 공연이 어느새 록 페스티벌을 방불케 하는 열기로 가득 찼다.
잔나비(사진=페포니뮤직)
잔나비(사진=페포니뮤직)


최정훈은 “같은 공간에서 3시간을 달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는데 여러분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공연을 이끌어간 힘은 잔나비뿐 아니라 끊임없이 목소리를 보탠 관객에게서도 나왔다.

‘오버 더 레인보우’로 다시 숨을 고른 뒤 ‘외딴섬 로맨틱’이 시작되자 무대의 커튼이 활짝 열렸다. 숨겨져 있던 메인 무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를 든 채 노래하는 최정훈의 익살스러운 퍼포먼스에 환호가 터졌다. ‘블루버드, 스프레드 유어 윙스!’에서는 최정훈의 손짓에 맞춰 꽃가루가 쏟아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에너지는 식지 않았다. 최정훈은 피아노 앞에 앉아 ‘모든 소년 소녀들 1: 버드맨’을 열창했고, ‘모든 소년 소녀들 2: 무지개’에서는 무지개를 형상화한 레이저와 함께 공연장을 누볐다. 관객들도 자리에서 뛰고 노래하며 응답했다. 엔딩 브레이크 이후 울려 퍼진 ‘가을밤에 든 생각’은 뜨거웠던 공연을 다시 깊은 가을의 정서로 데려왔다.

최정훈은 공연 막바지 무대에서 흘린 땀과 함께한 순간들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짧게 스쳐 지나가는 찰나일지라도 언젠가 잔나비의 음악을 들으면 그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를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이날 공연에는 오래 기억에 남을 장면들이 가득했다.

잔나비(사진=페포니뮤직)
잔나비(사진=페포니뮤직)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잔나비가 발라드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발라드를 단순히 느리고 조용한 음악으로 가두지 않았다. 때로는 재즈처럼 섬세하게, 때로는 록처럼 폭발적으로, 때로는 팬들과 나누는 대화처럼 30여 곡을 친밀하게 풀어냈다. 공연장 중앙에 위치한 턴테이블 무대는 가수와 관객의 물리적 거리를 좁혔고, 합창과 즉흥적인 소통은 마음의 거리마저 허물었다.

이번 공연은 잔나비에게도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지난해 인디밴드 최초로 케이스포돔에 입성한 데 이어 올해는 같은 공연장에서 서로 다른 콘셉트의 무대를 선보이게 됐다. 23일 발라드 컬렉션에 이어 24~25일에는 아시아 투어의 대미를 장식하는 ‘스웨트 앤 스타더스트’가 열린다. 세 차례 공연은 예매 시작 5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규모를 키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음악을 새로운 형식으로 재구성한 잔나비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팬들에게는 익숙한 노래를 새롭게 경험하는 시간이었고, 잔나비에게는 밴드로서의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증명하는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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