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를 사유하는 두 시선: 2026 성북아트위크에서 만난 서도호와 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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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사유하는 두 시선: 2026 성북아트위크에서 만난 서도호와 정보원

문화매거진 2026-10-22 20:16:44 신고

[문화매거진=정지호 작가] 서도호: 집을 어루만지는 기억

1970년대 서세옥은 성북동 한 자락에 한옥을 짓고, 무송재라 당호를 붙였다. 집의 이름처럼 선비정신을 이어온 문인화가였던 그는 화조와 괴석, 산수 같은 전통적인 문인화의 화제를 자신의 내면과 사유로 확장하며 독자적인 수묵 세계를 구축했다.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서도호는 2013년 성북동 한옥을 탁본하는 프로젝트 ‘러빙/러빙(Rubbing/Loving)’을 시작했다. 문지르는 행위(Rubbing)와 사랑하는 행위(Loving)의 발음이 닮았다는 데서 출발한 작업이었다. 집의 표면을 한지로 감싸고 흑연으로 문질러 벽과 문, 창호에 남은 요철과 흠집을 옮겨내는 과정은 단순한 건축물의 재현을 넘어 오랫동안 머물렀던 장소를 보듬는 행위에 가까웠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연장선에서 제작된 2026년 신작도 만날 수 있었다. 과거 집 전체를 탁본했던 작업과 달리, 아버지의 손길이 남은 담벼락의 문양과 정원의 석조물 등 집의 일부에 주목했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장소를 기록하는 행위가 다시 아버지와의 추억을 어루만지는 장치가 되는 셈이다. 2층 전시장 안쪽에는 탁본 과정과 작가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도 함께 상영되고 있었다.

▲ 전시장 영상 내 탁본 작업 과정 / 사진: 정지호 제공
▲ 전시장 영상 내 탁본 작업 과정 / 사진: 정지호 제공


이어진 3층에서는 인간과 존재를 탐구한 서세옥과 서도호의 작품이 나란히 펼쳐졌다. 서세옥이 수묵화에서 군중의 율동을 절제된 형식으로 표현한 것과 대조적으로, 서도호의 ‘카르마’에서는 구체적인 인간의 형상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얽혔다. 두 작가의 조형 언어 차이를 의도적으로 병치하는 전시 구성이 이어지는 대목이었다. 그간 두 작가가 부자 관계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작품세계를 나란히 들여다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이번 전시는 두 작가의 조형 언어를 비교하며 서도호의 작업세계가 형성된 배경까지 살펴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는 점에서 기존에 접했던 서도호의 전시와는 또 다른 흥미를 주었다.

▲ 서도호, '나의 집들', 2014 / 사진: 정지호 제공
▲ 서도호, '나의 집들', 2014 / 사진: 정지호 제공


‘카르마’와 함께 전시된 ‘나의 집들’은 수제 코튼지에 실을 꿰어 집의 형태를 구현한 작업이었는데, 마치 그간 인간과 집, 장소성을 이어 탐구해 온 작가의 작업세계 전체를 하나의 스케치로 옮겨놓은 듯했다. 작품 우측에 위치한 집 모양의 낙하산에 의지해 하강하는 사람의 형상에서는 작가가 꾸준히 이야기해 온 이주와 낯선 문화로의 연착륙을 떠올렸다. 반대로 좌측 하단에 위치한 위쪽 화살표로 가득한 집에서는 ‘비밀의 정원’이 연상됐다. 한옥이 공중에 실린 채 낯선 도시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마침내 새로운 건축물과 결합하는 모습에서 느꼈던 부유(浮遊)의 정서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중앙부에 그려진 서울과 LA를 잇는 다리 위의 집은 아마 ‘완벽한 집: 다리 프로젝트(A Perfect Home: The Bridge Project)’의 스케치가 아닐까. 

현실의 장소를 출발점으로 삼으면서도 집의 존재와 위치를 상상 속에서 다시 구성한다는 점에서, 한 작품 안에 담긴 서도호의 스케치들은 서로 연결되어 보였다. 집에 관한 사유를 실로 그려낸 듯한 이 작품은 멀리서 한눈에 보고 싶다가도 가까이서 하나씩 뜯어보고 싶은 재미가 있었다.

정보원: 조각과 일상 사이 공간

미술관 밖으로 나서 열 발자국쯤 뗐을까. 차도 옆 옹벽을 따라 조성된 보행로로 정보원의 ‘산책’이 이어졌다. 공간과 관계를 연결하는 매체로 조각을 탐구해 온 작가의 작업이었다. 작가는 거대한 조형물을 길 양 끝자락에 배치해 그 사이로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방문했을 당시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이 강아지와 함께 정말로 그 길을 산책하고 있어 웃음이 나왔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부러 온 관람객이 아니라, 그저 일상의 길을 걷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 정보원 '산책' 전시 전경 / 사진: 정지호 제공
▲ 정보원 '산책' 전시 전경 / 사진: 정지호 제공


아마 주민들에게 이곳은 특별한 예술적 경험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그저 익숙한 산책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작품의 공간적 특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사람이 머무르고 지나는 조형물 사이 길은, 작품과 주변의 일상을 별다른 경계 없이 맞닿게 했다. 어쩌다 보니 한 관람객이 작가가 이야기한 공간과 관계의 연결을 확인한 셈이다. 그래서 작업을 미술관 내부가 아닌 길목에서 만나도록 한 전시 기획이 더 영리한 선택으로 느껴졌다.

앞서 말했듯, 정보원은 오랫동안 공공조각을 통해 조형물과 주변 환경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대표적인 초기 작업으론 제주 ‘88 서울올림픽 성화 도착 기념 조형물’이 있는데, 거리갤러리에 상영 중이던 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올림픽조직위원회가 주도한 지명공모에서 프랑스 유학파인 그의 모더니즘적 ‘집합 구성’ 조각이 당선됐으나 당시 제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제주의 고유한 토속성과 문화적 맥락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작가는 구조물 표면 마감과 재료에서 제주의 현무암을 연상할 수 있도록 한 의도를 설명하고, 작품에 담긴 ‘질서와 카오스의 조화’라는 개념을 주민들에게 전달하며 설득했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설명을 들은 주민들은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고 수긍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일화가 공공미술의 조형적 완결성과 대중의 수용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작가가 의도한 조형 언어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작품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오히려 작품을 둘러싼 설명과 대화가 간극을 좁힌다.

그렇다면 공공미술은 작품 자체의 조형적 설득력만으로 대중과 관계 맺을 수 있을까. 작품이 놓이는 장소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소통까지를 공공미술을 이루는 요건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질문을 다시 ‘산책’으로 가져오면 흥미로운 대비가 생긴다. 제주 조형물에서는 작가의 설명이 작품과 주민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면, 성북의 ‘산책’에서는 작품이 놓인 공간의 쓰임 자체가 관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론 길을 걷는 사람이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거나 예술로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별도의 설명 없이도 누군가의 일상적인 움직임이 작품의 공간적 가능성을 드러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정보원의 조각은 복잡한 주변 환경 속에서 견고한 구조물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도, 그 사이에 형성되는 여백과 빛, 공기 같은 비가시적 요소들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물질의 양감만큼이나 구조물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견고한 물질(mass)과 열린 공간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에서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태도가 느껴졌다.

장소와 예술의 연결, 2026 성북아트위크

성북은 오래전부터 여러 예술가와 문인이 거주하며 창작과 교류를 이어온 지역이다. 오늘날에도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성북 미디어문화마루, 돌곶이생활예술문화센터, 성북문화예술교육센터 등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과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주민과 예술의 접점을 넓혀가고 있다. 평소에도 이러한 문화예술 기반이 인상적인 지역이었다.

올해 처음 개최된 성북아트위크는 이러한 지역의 문화예술 자산을 하나의 미술 축제로 연결하고자 했다. 직접 살펴본 성북아트위크의 흥미로운 점은 지역에 이미 축적된 역사와 장소의 의미를 동시대 미술과 연결한다는 데 있었다. 서도호의 작업이 유년기를 보낸 한옥을 매개로 삶과 기억을 되짚는다면, 정보원의 공공조각은 익숙한 거리에서 사람과 공간이 관계 맺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주었다.

한 지역의 역사와 예술을 살펴보는 일이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이 삶과 창작을 이어온 지역의 특성을 살린 고즈넉한 매력의 아트위크. 예술인으로서 반가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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