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결실을 세공 기술로 영원히 간직하는 럭셔리 메종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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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결실을 세공 기술로 영원히 간직하는 럭셔리 메종의 시선

마리끌레르 2026-10-22 12:00:00 신고

까르띠에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아카이브를 접할 수 있었는데,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컬렉션을 하나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뚜띠 프루티(Tutti Frutti)를 선택할 겁니다. 그 탄생 배경부터 꽤나 흥미롭거든요.
20세기 초 인도를 방문한 자크 까르띠에는 마하라자라 불리는 인도 토후국의 군주들이 소장한 화려한 보석에 매료되었습니다. 특히 무굴 제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보석을 잎사귀와 꽃, 열매 모양으로 조각하는 전통에 주목했죠. 인도 왕실과 교류하며 이러한 보석 문화를 접한 까르띠에는 여기에 메종만의 감각을 더했습니다. 루비와 에메랄드의 붉은색과 녹색에 사파이어의 청색까지 더해, 온갖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듯한 화려한 주얼리를 탄생시킨 겁니다.


보통 값비싼 주얼리라고 하면 커다란 보석 하나를 중심에 두고 그 주변을 작은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뚜띠 프루티는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컬러 스톤들을 한데 모아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작품을 완성해 버렸거든요. 보석의 크기와 가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가치를 디자인과 스타일로 만들어낸 까르띠에의 영리함. 애사심을 차치하고도 저는 그 점이 참 멋있었습니다. 물론 알록달록한 색감과 탐스러운 열매 모양이 제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것도 사실이고요.

얼마 전 문득 그 뚜띠 프루티가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예전에 다녀온 해외 경매 프리뷰와 사인드 주얼리 전문점, 까르띠에 전시에서 만났던 작품들을 사진첩에서 찾아보다가 결국 인스타그램까지 뒤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며칠 뒤, 제 피드에 조금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평소에는 다이아몬드와 시계로 가득했던 인스타그램 돋보기 화면에 밀 이삭, 커피빈, 포도송이, 석류와 같은 모티브의 주얼리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뚜띠 프루티가 이들을 저에게로 데리고 온 것이겠죠.

그런데 생각해 보니 재미있더라고요. 누군가는 커피빈을 볶아서 마시고, 누군가는 포도를 따서 와인을 만드는데, 또 누군가는 이걸 금과 보석으로 만들어 몸에 지닐 생각을 했다는 것이 말입니다. 더 재미있는 건 같은 자연물을 바라보는 디자이너들의 시선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이었어요. 마침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니, 익숙한 럭셔리 메종부터 낯선 독립 주얼리 브랜드까지 가을걷이를 한번 나서봤습니다. 물론 제가 수확한 건 사진뿐이지만요…



먼저 까르띠에의 그랭 드 카페(Grain de Café). 이름부터 커피빈입니다. 주얼리의 소재로는 좀처럼 떠올리지 않았을 커피빈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발상도 재미있지만, 저는 이 컬렉션을 볼 때마다 골드가 가진 매력을 새삼 느낍니다. 원두 특유의 중앙선을 살리고, 표면에는 빗살무늬를 더해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만들어냈습니다. 덕분에 납작한 형태임에도 제법 입체감이 느껴지죠. 흔히 골드 주얼리에서 볼 수 있는 매끈한 유광 마감 대신 섬세한 질감을 살린 덕분에 한층 시크하고 현대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완성한 콩알(!)들을 얼기설기 연결하고 그 사이사이에 다이아몬드를 더했을 뿐인데, 소박한 커피빈이 순식간에 우아한 주얼리로 변신합니다. 특히 네크리스에 매달린 커피빈들이 만들어내는 풍성한 실루엣을 보면, 까르띠에는 정말 무엇을 가져다 놓아도 주얼리로 만들 자신이 있나 싶습니다. 하긴, 커피빈을 이렇게 근사하게 만들 수 있다면 못할 게 뭐가 있을까요.




까르띠에가 평범한 커피빈에서 화려한 주얼리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면, 쇼메는 밀 이삭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에피 드 블레 드 쇼메(L’Épi de Blé de Chaumet)를 보면 밀이라는 식물이 원래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거든요. 프랑스어로 ‘블레(Blé)’는 밀, ‘에피(Épi)’는 이삭을 뜻합니다. 이삭은 밀이나 벼처럼 줄기 끝에 낟알이 촘촘하게 맺힌 부분을 가리키는데요. 그러니까 쇼메가 주얼리로 옮겨온 건 우리가 빵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밀알이 아니라, 그 밀알들이 주렁주렁 달린 이삭의 모습인 거죠.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밀 이삭을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농업과 수확의 여신인 데메테르와 케레스가 밀 이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될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었죠. 쇼메 역시 나폴레옹 시대부터 이 모티브를 사랑해 왔습니다. 조세핀 황후의 티아라에도 등장했을 만큼 메종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거든요.

특히 눈여겨볼 것은 골드의 마감 처리입니다. 반짝이는 폴리싱부터 은은한 새틴 브러싱, 거친 입자의 샌드블라스트까지 서로 다른 피니싱을 활용해 이삭의 질감을 표현했거든요. 덕분에 같은 옐로 골드인데도 빛을 받는 부분마다 색과 질감이 달라 보입니다. 여기에 낟알 사이로 가늘게 뻗어 나온 까락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는데, 그 방향과 곡선이 조금씩 달라 가만히 있는 주얼리인데도 마치 바람에 이삭이 나부끼는 듯한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금속으로 만든 이삭에서 바람의 움직임까지 느껴진다는 게 놀랍습니다. 평소에는 그저 식재료로만 생각했던 밀을 이렇게 공들여 표현한 걸 보면, 자연을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주얼리로 옮겨내는 쇼메의 솜씨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그런가 하면 자연의 모습을 훨씬 간결하게 표현한 주얼리도 있습니다. 티파니앤코의 팔로마 피카소 올리브 리프(Paloma Picasso® Olive Leaf®)는 디자이너의 개인적인 추억에서 탄생한 컬렉션입니다. 이름에서 짐작하셨겠지만, 팔로마 피카소는 바로 그 파블로 피카소의 딸이자 1980년부터 티파니앤코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컬렉션을 선보여 왔습니다. 그녀가 모로코 마라케시의 자택을 둘러싼 올리브나무 숲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주얼리입니다. 올리브 가지는 오래전부터 평화와 풍요를 상징해 왔는데, 그녀에게는 매일 마주하는 풍경이기도 했던 거죠.

사실 저는 사주에 목(木)의 기운이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 꽃이나 나무를 모티브로 한 주얼리에 유독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부족한 기운을 주얼리로 채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쁜 주얼리를 구경할 명분 하나는 생긴 셈이죠. 이 올리브 리프 이어링은 사진 속 모델보다 더 간결하고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버전을 실제 매장에 가서 착용해 봤을 정도로 눈여겨본 디자인입니다. 매끈한 골드 잎사귀 사이에 다이아몬드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제 눈에는 그 다이아몬드가 꼭 올리브 열매처럼 보였습니다. 화려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평범하게 지나칠 디자인도 아닙니다. 어느 옷차림에도 크게 방해되지 않을 만큼 얌전하면서, 자세히 보면 잎사귀의 유려한 곡선과 작은 다이아몬드가 꽤나 인상적이거든요. 자연의 형태를 몇 개의 간결한 선으로 정리하고도 그 특징을 잃지 않는 디자인. 쇼메가 이삭의 작은 까락까지 놓치지 않았다면, 팔로마 피카소는 몇 개의 선과 면만으로 올리브 가지를 완성한 셈이죠.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기보다, 이렇게 서로 다른 해석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의 모습을 주얼리로 옮기는 방법이 꼭 정교하게 재현하거나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에 움직임까지 더한 주얼리도 있거든요.



덴마크의 은세공 명가 조지 젠슨(Georg Jensen)의 문라이트 그레이프(Moonlight Grapes)는 그 이름처럼 포도송이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에는 100년도 넘은 사연이 있는데, 1918년 창립자 조지 젠슨이 은제 그릇에 장식했던 포도 모티브를 현대적인 주얼리로 다시 탄생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예로부터 포도는 풍요와 결실, 기쁨을 상징해 왔는데, 조지 젠슨은 이를 북유럽 디자인 특유의 간결한 조형미로 풀어낸거죠. 포도의 형태를 그저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크고 작은 실버 및 골드 구슬을 연결해 풍성한 한 송이를 만들어냈죠. 제가 특히 마음에 들었던 건 그 움직임입니다. 포도알들이 관절처럼 연결되어 착용자가 움직일 때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유연하게 흔들리는데, 마치 유명 와이너리의 포도밭에서 잘 익은 포도송이가 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가만히 놓아두면 하나의 조각 작품처럼 보이다가, 착용하는 순간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요. 장식을 덜어낸 대신 형태와 움직임으로 포도의 풍성함을 표현했다는 점이 참 근사합니다.


혹시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라는 주스를 기억하시나요? 어린 시절의 저는 그 제품 이름 때문인지 강렬했던 광고 컨셉트 때문인지 석류를 많이 먹어야 미녀가 될 수 있다는 묘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기회가 생기면 석류를 챙겨 먹고, 마트에서 석류 주스를 발견하면 괜히 하나씩 사 마시곤 했죠. 요즘은 예전만큼 쉽게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뜻밖에도 주얼리를 구경하다 석류를 다시 만났습니다.

뉴욕의 주얼리 브랜드 파멜라 러브(Pamela Love)는 고대 신화와 상징에서 영감을 얻어 부적처럼 간직할 수 있는 주얼리를 선보였습니다. 그중 루비 헤라 펜던트(Ruby Hera Pendant)는 그리스 신화에서 출발한 작품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수많은 씨앗을 품은 석류를 밀 이삭과 마찬가지로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겼고, 결혼과 출산의 여신 헤라와도 연결 지었죠. 파멜라 러브는 이러한 상징성을 18K 골드와 루비로 풀어냈습니다. 석류의 골드 껍질을 살짝 벌려 그 안에 붉은 루비를 세팅했는데, 작은 열매 안에 보석들이 빼곡히 들어찬 모습이 마치 풍성한 수확의 결실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석류의 속을 굳이 드러내고 그 안을 마치 석류알처럼 루비로 한알한알 채웠다는 발상이 특히 귀엽습니다. 껍질을 벌린 모습은 익살스럽지만, 그 안을 채운 루비의 깊고 선명한 붉은빛 덕분에 결코 장난스럽거나 가볍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익숙한 과일의 단면을 이토록 화려한 보석의 세계로 바꿔놓았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석류만큼이나 제가 좋아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몬드인데요. 초콜릿도 기왕이면 아몬드가 들어간 것을 고르고, 베이킹을 할 때도 아몬드 가루로 만든 디저트를 훨씬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몬드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게 자주 먹으면서도 껍질째 있는 모습은 낯설다니. 학창 시절 생물 시간에는 도대체 뭘 배운 걸까요.

그런 저에게 아몬드의 새로운 모습을 알려준 건 뜻밖에도 영국의 주얼리 브랜드 아누슈카(Annoushka)였습니다. 미솔로지 아몬드 참 펜던트(Mythology Almond Charm Pendant)는 18K 골드로 제작한 껍질 안에 흑단을 조각해 만든 아몬드를 품고 있습니다. 껍질을 열고 닫을 수 있고 작은 잎사귀까지 움직이도록 만들었죠. 서양에서는 좋은 일이 계속되기를 바라거나 불운을 피하고 싶을 때 나무를 만지거나 두드리는 풍습이 있는데, 아누슈카는 여기에서 착안해 실제 나무인 흑단으로 보호와 희망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펜던트는 손으로 만지며 행운을 빌 수 있는 작은 부적인 셈이죠. 껍질을 열어보는 장난스러운 발상과 달리,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골드 껍질과 볼드한 링크 체인 덕분에 외모는 제법 진지합니다. 이런 반전 매력이 있어서 더 끌리네요.


여섯 가지 주얼리를 차례로 살펴보니, 처음에는 그저 먹거리로만 생각했던 것들에 이렇게 다양한 형태와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재미있습니다. 밀 이삭의 가느다란 까락부터 흔들리는 포도알, 껍질 속에 감춰진 아몬드까지. 앞으로는 장을 보다가도 이런 작은 디테일을 한층 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주얼리 사진 옆에 실제 커피빈과 밀 이삭, 포도와 석류 사진을 나란히 놓고 한참 비교해 봤습니다. 주얼리를 보다가 자연물을 찾아보고, 다시 주얼리로 돌아와 세공의 디테일을 살피는 일을 반복했죠. 그러다 문득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주얼리가 궁금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잘 익은 포도와 석류가 먹고 싶어졌거든요.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그런 걸까요. 분명 주얼리 이야기를 쓰고 있었는데, 결국 식욕까지 수확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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