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권수빈 기자]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실제 생활에서 그 인물로 살아보고, 관람객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작품을 만들고, 인공지능과 유전공학으로 관심을 넓힌 예술가가 있다. 미국의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인 린 허쉬만 리슨(Lynn Hershman Leeson·1941)이다. 그의 작업은 기술을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이 인간의 정체성과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지 묻는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내년 2월 21일까지 서소문본관 2·3층에서 ‘린 허쉬만 리슨: 나의 [나]들’을 개최한다.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허쉬만 리슨의 미술관 개인전으로, 196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 작업까지 60여 년에 걸친 예술 세계를 회화와 사진, 조각, 미디어 설치, 영화, 아카이브 등 200여 점으로 소개한다.
1941년 미국에서 태어난 린 허쉬만 리슨은 1960~70년대 여성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다룬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비디오와 레이저디스크, 인터넷, 인공지능(AI) 등 새로운 기술을 작품에 끌어들이며 탐구 범위를 넓혔다. 감시와 사생활, 데이터 추적, 신체와 기계의 결합, 생명공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사는 기술의 변화와 함께 확장됐다. 기술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달라질 때마다 그 안에서 인간이 자신을 인식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도 작업의 주제가 됐다.
작가를 대표하는 초기 실험 가운데 하나는 가상의 인물 ‘로베르타 브라이트모어’다. 그는 1970년대 이 인물을 창조한 뒤 수년간 현실에서 로베르타로 생활하며 사회적 관계와 미디어가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을 탐구했다. 정체성을 타고난 성격이나 고정된 속성으로만 보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연기하고 만들어 가는 것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러한 실험은 오늘날 온라인에서 여러 계정을 운영하고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삶과도 연결해 볼 수 있다.
1980년대에는 관람객의 참여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대표작 ‘로나’는 레이저디스크를 활용한 인터랙티브 작품으로, 관람객이 리모컨으로 이야기의 경로를 선택할 수 있다. 관람객은 화면에 전달되는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머물지 않고, 직접 선택하면서 작품의 전개에 관여한다. 작품을 보는 사람의 행동이 경험의 일부가 된다는 점에서 당시의 미디어 환경을 실험한 작업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로나’와 ‘딥 컨택트’를 비롯해 작가가 자신을 영상으로 기록한 ‘전자일기’ 시리즈도 만날 수 있다.
전시 제목 ‘나의 [나]들’의 영문명은 ‘First Person Plural’이다. 영어 문법에서 ‘1인칭 복수’를 뜻하는 표현으로, 작가의 비디오 작업 ‘전자일기’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한글 제목의 대괄호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호를 빌려 기술 환경에서 복제되고 재구성되는 자아를 나타낸다. 하나의 정체성이 고정돼 있다기보다 타인과의 관계, 미디어, 데이터와 기술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전시의 관점을 담았다.
전시는 6개 섹션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카멜레온의 고백’은 1960~70년대 초기 회화와 드로잉, 조각 등 40여 점을 통해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정체성 실험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페르소나 만들기’에서는 ‘로베르타 브라이트모어’ 시리즈와 ‘세 명의 가상 비평가’, ‘히어로 샌드위치’ 시리즈를 통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수행되는 정체성을 다룬다.
‘살과 기계’에서는 신체와 기술이 결합하면서 인간의 몸과 정체성에 관한 경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본다. 사진 콜라주 ‘팬텀 림’ 시리즈와 텔레로보틱 인형 작업 ‘틸리’, ‘사이버로베르타’, 인간과 로봇이 결합한 여성의 이미지를 상상한 ‘사이보그’ 시리즈가 소개된다. 신체를 독립된 생물학적 실체로만 바라보는 대신 기술과 이미지가 개입한 몸의 모습을 보여준다.
네 번째 섹션 ‘스크린, 응답하다’는 관람객의 행동에 반응하는 미디어 작업에 초점을 맞춘다. ‘로나’와 ‘딥 컨택트’는 물론 작가의 영상 일기인 ‘전자일기’ 시리즈를 통해 스크린이 이미지를 전달하는 창을 넘어 감각과 행동,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관람객이 작품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기술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데이터가 사랑이 될 때’에서는 데이터와 네트워크, 인공지능이 감정과 욕망, 인간관계에 들어오는 모습을 다룬다. 인공지능 에이전트와 가상 인물의 상호작용을 다룬 ‘에이전트 루비’와 영화 ‘테크노러스트’가 주요 작품이다. 기술이 정보를 처리하는 도구를 넘어 인간과 대화하고 관계를 맺는 존재로 받아들여질 때 사랑과 친밀함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질문한다.
마지막 ‘편집된 미래’에서는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으로 범위를 넓힌다. ‘8번 방’과 생명과학자들의 인터뷰 영상 등을 통해 유전 정보와 생명 연장, 생물학적 정체성을 바꾸려는 시도가 인간과 생명에 관한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짚는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인터랙티브 작품을 한국어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기술 기반 미디어 작가팀 서울 익스프레스 및 작가 스튜디오와 협업해 ‘로나’와 ‘딥 컨택트’, ‘에이전트 루비’에 한글 자막과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디어 아티스트뿐 아니라 영화감독으로서의 작업도 소개한다. 서울아트시네마와 협력한 장편영화 상영 프로그램 ‘새롭게 발견된 여성들’이 오는 11월부터 2027년 1월까지 진행되며, 영화 세 편을 총 12회 상영한다. 여성 예술가들의 성취를 다룬 다큐멘터리 ‘!여성 예술 혁명: 감춰진 역사’, 과거 인물을 현재로 불러내는 시간 여행 영화 ‘에이다 러브레이스’,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를 다룬 SF 영화 ‘테크노러스트’가 상영된다. ‘에이다 러브레이스’와 ‘테크노러스트’에는 영국 배우 틸다 스윈튼이 출연하며, 특히 ‘테크노러스트’에서는 스윈튼이 1인 4역을 맡았다. 상영 기간 중 영화 관계자와 비평가가 참여하는 관객과의 대화도 열린다.
린 허쉬만 리슨의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사회적 역할과 타인의 시선이 자아를 만들고, 미디어와 네트워크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바꾸며, AI와 생명공학은 인간의 경계에 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관람객은 작품의 형식과 기술적 실험을 살펴보는 동시에 온라인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실제 자신 사이의 차이, 기술에 맡기거나 의존하는 일상 속 판단과 관계도 돌아볼 수 있다.
전시는 예약 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작품 해설은 매일 오후 3시에 제공된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도슨팅 앱에서도 해설을 들을 수 있다.
뉴스컬처 권수빈 ppbn0101@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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