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문화재단과 디아 컨템포러리(대표 조수정)는 10월 24일부터 11월 28일까지 용산문화재단 복합문화공간 1층 팝업홀에서 연여인 작가의 전시 《Green Room》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도약 이전의 시간’을 주제로 제작한 신작 7점과 소장가들로부터 대여한 주요 작품 등 총 14점을 선보인다.
지난해 박찬욱 감독의 영화 포스터 작업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은 연여인은 2025년 디아 컨템포러리 개인전 《The House That My Mother Built》에서 출품작 전 작품이 판매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전시는 그로부터 1년 만에 선보이는 새로운 회화적 서사로, 작가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만의 시간을 통과하는 존재들의 모습을 통해 변화와 성장의 의미를 되묻는다.
전시 제목인 ‘그린룸(Green Room)’은 배우나 공연자가 무대에 오르기 전 대기하며 준비하는 공간을 뜻한다. 연여인은 이곳을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기 직전의 ‘웅크림’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해석한다. 기대와 긴장, 망설임과 결심이 교차하는 대기실은 단순히 차례를 기다리는 공간을 넘어, 다음 움직임을 위한 힘이 축적되는 시간의 은유가 된다.
작품 속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며, 쉽게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견딘다.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낮은 숫자가 나오더라도 게임을 멈추지 않고, 무겁고 비린 물고기를 먼 바다까지 옮기며, 종이를 접었다 펼치는 행위를 반복한다. 겉으로는 무의미하거나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움직임이지만, 작가는 그 안에 쌓이는 경험과 감각, 그리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변화의 가능성을 포착한다.
전시의 중심 작품인 〈Green Room〉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인물들을 담았다. 잠든 사람과 무료하게 앉아 있는 사람, 자신의 차례가 온 줄 알고 가방을 든 채 나갈 준비를 하는 인물이 한 공간에 놓여 있다. 그러나 문은 잠겨 있고, 열쇠는 인물들이 발견하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져 있다. 벽에 걸린 바깥 풍경은 문 너머의 세계를 향한 갈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지금 머물러 있는 자리와 나아가야 할 방향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I keep rolling ones and twos…〉는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보드게임에 비유한다. 주인공은 주사위를 굴릴 때마다 1과 2라는 낮은 숫자를 얻지만, 게임을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여정 중에 등장하는 눈과 귀, 입 등의 아이템과 예상하지 못한 괴수는 삶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감각과 돌발적인 경험을 상징한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계속 시도하는 행위 자체가 다음 단계로 향하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Passage〉와 〈Let’s go〉에서는 삶의 무게와 개인의 감정을 물고기라는 형상으로 표현한다. 인물은 축축하고 무거운 물고기를 산에서 바다까지 옮기는 힘겨운 여정에 나선다. 물고기를 바다에 풀어주는 순간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전환점이지만,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여전히 길고 고되다. 작가는 도달의 순간만큼이나 그곳에 이르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시간과 움직임에 시선을 둔다.
〈Origami (The Meeting 2)〉는 반복적인 종이접기를 통해 기억과 경험이 축적되는 방식을 시각화한다. 종이는 접히고 펼쳐질 때마다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지만, 한 번 생긴 자국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지나온 시간이 현재의 자신에게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다시 새로운 선택과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변화는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모습을 형성해 가는 과정이라는 작가의 시선이 담겼다.
이번 전시에서는 신작과 함께 2019년 작품 〈The Meeting〉, 2025년 개인전의 주요 작품도 소개된다. 과거 작품 속 인물들이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은 채 서로의 방향을 논의했다면, 이번 신작의 인물들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작가가 지속해 온 기억과 내면에 대한 탐색이 기다림과 실천이라는 주제로 확장되는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연여인의 회화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이미지와 서사로 특징지어진다. 펜과 잉크, 유화 등 아날로그 매체부터 영상과 디지털 미디어까지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며,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현실적 환상’으로 설명한다. 인물과 동물, 익숙한 사물과 공간이 화면 안에서 낯선 관계를 맺고, 서로 다른 기억과 감정이 겹쳐지면서 말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
1995년 서울에서 태어난 연여인은 서강대학교에서 심리학과 Creative Visual Arts를 복수전공했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 SeMA 벙커에서 첫 개인전 《Engram; 기억흔적》을 개최한 이후 회화와 조소, 영상 미디어를 넘나들며 작업 영역을 넓혀 왔다. 2023년 복합문화공간 DOOR에서 《YeonYeoin Ink Collection ‘001030’》을 선보였으며, 2025년 구하우스미술관 기획전 《작은 거인들—구하우스가 찾은 90년대생》에 참여해 작품을 미술관 소장품으로 편입시켰다. 2026년에는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열린 보그 코리아 창간 30주년 기념전 《Vogue into Art》에 참여했다.
순수미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레드벨벳의 ‘Cosmic’ 뮤직비디오 삽화와 애니메이션, 젠틀몬스터 HAUS NOWHERE Shenzhen의 미디어 작업 〈recess〉, 박찬욱 감독의 드라마 《동조자》 한국 포스터, 윤종빈 감독의 드라마 《나인 퍼즐》 포스터 등에 참여했다. 《나인 퍼즐》 모션 포스터는 2025 클리오 엔터테인먼트 어워즈 텔레비전·스트리밍 부문 Key Art–Motion Poster 카테고리에서 실버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번 전시에서 연여인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아직 도약하지 못했다고 해서 가능성마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 〈Don’t be grime, Take your time〉은 저마다의 때가 있는 만큼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는 시선을 전한다. 긴 여정 이후의 모습을 담은 〈Nest〉에서는 인물이 작은 둥지에서 새와 함께 안락한 시간을 보낸다. 더 멀리 나아가는 것만이 성장의 전부가 아니며, 자신에게 필요한 삶의 형태를 발견하는 것 또한 중요한 도달이라는 의미다.
《Green Room》은 성공과 실패, 정체와 성장을 성급하게 구분하는 대신 그 사이에 놓인 시간을 바라본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아니며, 반복은 언제나 제자리걸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험이 쌓이고 감각이 달라지며 다음 움직임을 위한 힘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시는 관람객에게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지금의 자리가 멈춤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도약의 방향과 속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연여인이 그린 ‘도약 이전의 시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들이 품고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전시는 11월 28일까지 용산문화재단 복합문화공간 1층 팝업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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