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궁정의 연회에서 발레는 신분과 권위를 드러내는 예술이었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귀족들이 정해진 예법에 따라 움직였고, 춤의 질서와 조화가 중요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자 무대의 주인공은 왕과 귀족에서 사랑에 상처받은 평범한 소녀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영혼들로 달라졌다. 여성 무용수는 발끝으로 몸을 지탱하며 중력에서 해방된 듯 춤췄고, 관객은 정교한 동작 안에서 인간의 슬픔과 사랑,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바라보게 됐다. 궁정의 권위를 표현하던 춤이 인간 내면의 비극을 담아내기까지 발레는 수백 년에 걸쳐 변화했다.
서울발레시어터가 선보이는 '가을밤 낭만발레'는 서로 다른 시대의 발레 미학을 한 공연에서 비교하도록 구성했다. 화려한 궁정 연회를 재구성한 '궁정발레'와 19세기 낭만주의 발레의 대표작 '지젤(Giselle)'을 70분에 담았다. 정교한 궁정 예법과 로코코 의상, 비극적 사랑과 초자연적 존재를 표현하는 백색 군무까지 발레의 역사적 변화를 무대에서 살필 수 있다. 공연은 해설을 곁들인 갈라 형식이다. 궁정에서 발레가 담당했던 사회적 역할, 낭만주의 시대에 등장한 무대 표현, 의상과 신체 기술의 변천을 두 작품의 대비에서 읽을 수 있다. 1995년 창단한 민간 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가 영등포아트홀 상주단체로 선보이는 세 번째 프로그램이다.
'가을밤 낭만발레'의 첫 프로그램인 '궁정발레'는 바로크 궁정 문화와 화려한 로코코 복식에서 미적 요소를 가져왔다. 프랑스 궁정발레가 번성한 17세기와 로코코 양식이 유행한 18세기는 역사적으로 구별된다. 공연은 특정 연도의 궁정 행사를 고증해 복원하기보다 왕실 무용이 상징하는 예법과 장식성을 발레 무대에 재구성한 프로그램이다.
◇로코코 드레스·가발·궁정 연회…의상이 말하는 시대
'궁정발레'의 시각적 특징은 의상에서 드러난다. 풍성하게 부풀린 드레스와 화려한 장식, 정교하게 꾸민 머리 모양은 당시 유럽 상류사회의 미적 취향을 떠올리게 한다. 로코코 시대 복식은 섬세한 문양과 장식, 부드러운 색채, 풍성한 실루엣을 특징으로 한다. 여성의 드레스는 치마를 넓게 펼치고 허리와 상체의 형태를 강조했다. 남성 역시 장식이 많은 외투와 조끼, 무릎길이 바지 등을 착용했다. 복식은 개인의 미적 취향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예법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의상은 무용수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미친다. 넓게 펼쳐진 치마와 몸에 밀착된 상의는 현대 발레 의상보다 동작에 제약을 준다. 상체를 곧게 유지하고 팔과 손목, 머리의 방향을 세밀하게 조절하는 동작은 의상 자체가 갖는 장식성을 살리는 데 적합하다.
궁정 연회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공연에서는 무용수 사이의 거리와 대형, 서로에게 인사하는 행동, 파트너와 호흡을 조절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춤은 개인의 기교를 과시하는 수단인 동시에 여러 사람이 정해진 질서를 공유하는 예법이기도 했다. 서울발레시어터의 '궁정발레'는 관객이 평소 접하는 클래식 발레의 이미지와 다른 무대 감각을 제시한다. 짧은 튀튀와 고난도 회전보다 화려한 복식과 우아한 몸짓, 정교한 공간 구성이 중심에 놓인다. 발레가 처음부터 높은 도약과 연속 회전을 핵심으로 삼았던 예술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지젤'이 바꾼 무대…귀족의 권위에서 인간의 감정까지
두 번째 프로그램 '지젤'은 궁정발레와 전혀 다른 세계를 다룬다. 1841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 왕립음악아카데미에서 초연된 '지젤'은 낭만주의 발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아돌프 아당(Adolphe Adam)이 음악을 작곡했고 장 코랄리(Jean Coralli)와 쥘 페로(Jules Perrot)가 원안무를 맡았다. 대본은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와 쥘 앙리 베르누아 드 생조르주(Jules-Henri Vernoy de Saint-Georges)가 썼다. '지젤'의 중심인물은 시골에 사는 평범한 소녀다. 왕과 귀족의 권위를 과시하던 궁정발레와 달리 사랑과 배신, 슬픔, 용서라는 개인의 감정이 서사의 중심을 차지한다. 농촌의 일상과 초자연적 세계를 대조하는 구성도 낭만주의 발레의 특징이다.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는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 자연과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 문학과 음악, 미술에서 확산된 미적 변화는 발레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용수는 극적인 사건을 설명하거나 기술을 보여주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비현실적인 존재와 복잡한 감정을 신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1832년 파리에서 초연된 '라 실피드(La Sylphide)'는 낭만주의 발레의 발전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마리 탈리오니(Marie Taglioni)가 포앵트 기술과 가벼운 움직임을 활용해 요정의 비현실적 존재감을 표현했다. 이후 '지젤'에서는 현실의 인간과 죽은 여성의 영혼을 대비시키며 낭만발레의 미학이 한층 발전했다.
발레의 표현 방식도 변화했다. 화려한 궁정 의상에서 가볍고 투명한 소재의 무용복으로 바뀌고, 여성 무용수의 발끝과 상체는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이미지를 형성했다. 낭만발레 특유의 부드러운 팔 동작과 길게 이어지는 선은 인간의 몸이 실제 무게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배신당한 시골 처녀…'지젤'의 비극적 사랑
'지젤'은 2막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1막은 밝고 활기찬 농촌 마을에서 시작한다. 춤을 좋아하는 소녀 지젤은 알브레히트라는 청년을 사랑한다. 그러나 알브레히트의 실제 신분은 귀족이다. 평범한 마을 청년으로 신분을 숨긴 채 지젤에게 접근했고 이미 다른 여성과 약혼한 상태다. 마을 사냥터지기 힐라리온은 지젤을 사랑하지만 지젤의 마음은 알브레히트를 향한다. 힐라리온은 알브레히트의 신분을 의심하고 그의 정체를 밝히려 한다. 지젤이 믿었던 사랑은 알브레히트의 기만이 드러나면서 무너진다.
알브레히트가 귀족이며 바틸드 공주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젤은 큰 충격을 받는다.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성을 잃은 끝에 죽음을 맞는다. 발레사에서 유명한 '지젤'의 광란 장면은 인물의 심리적 붕괴를 춤과 연기로 보여주는 구간이다. 1막의 밝은 정서는 지젤의 죽음과 더불어 급격히 달라진다. 생동감 넘치는 농촌의 축제는 비극으로 끝나고 2막에서는 달빛이 비치는 밤의 숲과 무덤이 무대의 중심이 된다.
◇달빛 아래 흰 유령들…낭만발레의 백색 군무
'지젤' 2막에는 윌리(Wili)라는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한다. 윌리는 결혼 전에 죽은 젊은 여성의 영혼이다. 살아 있는 남성을 유혹해 밤새 춤추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전설적 존재에서 착안했다. 윌리의 여왕 미르타는 밤의 숲을 지배한다. 흰 의상을 입은 윌리들이 나타나 무리를 이루고, 춤추는 남성들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움직여야 한다. 지젤 역시 죽은 뒤 윌리의 일원이 된다.
알브레히트는 지젤의 무덤을 찾아온다. 미르타와 윌리들은 알브레히트에게 죽음에 이를 때까지 춤추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지젤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보호하려 한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복수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지젤은 용서를 선택한다. 알브레히트는 새벽이 올 때까지 춤을 추고 지젤은 그를 지킨다. 동이 트자 윌리들의 힘이 사라지고 알브레히트는 살아남는다. 지젤은 다시 영혼의 세계로 돌아간다.
2막을 대표하는 무용은 윌리들의 백색 군무다. 동일한 형태의 흰 튀튀를 입은 여성 무용수들이 일정한 간격과 속도를 유지하며 움직인다. 팔과 상체는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고 발끝은 바닥에서 미끄러지듯 이동한다. 낭만발레에서 이러한 구성은 '발레 블랑(Ballet blanc)'으로 불린다. 흰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군무를 중심에 세워 요정이나 영혼, 초자연적 존재의 세계를 표현하는 무대 형식이다. '라 실피드'와 '지젤', 이후 '백조의 호수' 등의 백색 군무는 발레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95년 창단 서울발레시어터…고전과 창작발레의 실험
공연을 맡은 서울발레시어터(Seoul Ballet Theatre)는 1995년 창단한 국내 민간 전문발레단이다. 김인희 초대 단장과 로이 토비아스 초대 예술감독, 상임안무가 제임스 전 등이 창단 초기부터 활동했다. 김인희는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동했고, 로이 토비아스는 유니버설발레단 예술감독을 지낸 안무가다. 미국 줄리아드학교에서 공부한 제임스 전은 창작발레 분야에서 서울발레시어터의 레퍼토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서울발레시어터의 역사는 국내 민간 발레단이 전통적인 클래식 레퍼토리에 의존하지 않고 창작 작품을 개발한 과정과 관계가 깊다. 1995년 창단 공연에서 선보인 '현존(Being)'은 록 음악과 현대적 안무를 결합한 작품이다. 클래식 발레의 기술을 활용하면서 기존 고전 작품과 다른 음악과 신체 표현을 시도했다. 이후 '피가로의 결혼', '봄, 시냇물', '창고', '결혼' 등 여러 창작 작품을 발표했다. 고전발레와 현대적 창작을 병행한 경험은 '가을밤 낭만발레'의 구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적인 발레 미학을 관객에게 소개하면서 서로 다른 시대의 움직임과 표현을 비교하도록 설계했다는 점에서 서울발레시어터가 축적한 레퍼토리의 성격이 반영됐다.
◇최진수의 해설…발레의 문법을 관객에게 설명하다
서울발레시어터를 이끄는 최진수는 2018년 제3대 단장으로 취임했다. 전문 무용수와 안무가로 활동한 경험을 토대로 창작 작품의 개발과 발레 교육, 공연 기획을 담당했다. 최진수는 발레의 기술적 완성도를 중시하면서도 관객의 이해를 높이는 공연 형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문 무용수의 기교를 감상하는 방식에서 공연의 역사와 안무, 인물의 감정을 알고 관람하는 방식까지 프로그램의 범위를 넓혔다.
'가을밤 낭만발레'에서도 해설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해설 공연의 강점은 무용수가 보여주는 동작을 감상할 때 작품의 배경지식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발레에서는 팔을 뻗는 방향, 발끝의 사용, 몸의 균형과 회전, 파트너와의 거리에도 서로 다른 표현 의도가 반영된다. 설명을 들은 뒤 실제 움직임을 관찰하면 작품의 차이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궁정발레의 정제된 자세와 낭만발레의 가벼운 움직임은 외형적으로도 다르다. 그러나 의상과 음악, 시대적 배경을 알고 감상하면 무용수의 몸이 표현하는 사회적 의미와 감정의 차이까지 살필 수 있다.
궁정발레가 왕실의 질서를 보여줬다면 '지젤'은 인간의 사랑과 상실을 표현했다. 화려한 의상이 사라진 무대에 남은 것은 사람의 몸과 감정이었다. 수백 년의 시간을 거쳐 발레가 얻은 변화는 기술의 발전에만 있지 않다. 누구의 이야기를 춤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달라졌다. '가을밤 낭만발레'는 두 시대의 무용을 나란히 세워 발레가 걸어온 시간을 되짚는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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