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의 마음을 오래 짐작해 보면 |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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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의 마음을 오래 짐작해 보면 | 예스24

채널예스 2026-10-20 00:00:00 신고

ⓒ김봉곤


이서수의 네 번째 장편소설 『우리 착한 나진』은 평생 ‘착한 사람’이라 평가받으며 그 틀 안에서 무난하게 살아온 평범한 30대 여성 ‘나진’의 시선으로 우리가 ‘선의’라 믿는 기준들을 새로이 돌아보는 소설이다. 자신의 선택과 신념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까지도 흔들리는 격변 속에서 나진은 계속 ‘착한 사람’일 수 있을까?

 

이서수 작가는 소설 속 나진이 미래를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스스로에게도 이 작품은 하나의 큰 모험이었다고 말한다. 그 모험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2014년 등단 후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 오셨어요. 네 번째 장편소설인 『우리 착한 나진』은 작가님의 아홉 번째 책이기도 하죠. 『우리 착한 나진』을 출간한 소감이 어떠신가요?

『우리 착한 나진』을 출간하기 전엔 핍진한 소설을 쓴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저도 그런 작업을 계속 이어 갈 줄 알았는데 『우리 착한 나진』을 쓰면서 큰 변화를 겪었죠. 스토리텔링으로서의 소설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이 책을 출간한 뒤엔 전개를 예측할 수 없어 단숨에 읽게 되었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고, 주로 등장인물들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물으시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하며 구조를 우선했던 제 소설의 세계가 조금씩 달라지며 넓어지고 있음을 느껴요.

 

『우리 착한 나진』이라는 제목이 뜯어볼수록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사용되는 방식이 음험한 데가 있는 단어인 것 같아요. ‘우리 엄마’ ‘우리 가족’처럼 명백히 ‘나’의 영역인데도 ‘우리’라고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표현되는 것을 떠올려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소설 속 군데군데 등장하는 “우리 착한 나진이”를 볼 때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고요. 제목은 어떻게 짓게 되었나요?

저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넣어서 제목을 지을 때가 많아요. 단편과 장편 가리지 않고요. 쓰기 전에 인물상이 또렷하게 잡혀야 소설을 완성할 수 있어서 저에겐 인물이 가장 중요해요. 이 소설도 나진의 캐릭터가 선명하게 떠올랐기에 그걸 붙잡고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맨 처음 설정한 나진의 특징이 ‘착함’이었거든요. 그런데 인물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과연 정말로 착한지, 착한 척할 뿐인 건지 작가인 저조차 투명하게 알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내린 결론이 있긴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우리 착한 나진’이라는 말처럼 강요와 당부, 오해와 아이러니가 내포되어 있을 거예요. 

 

소설 속 나진이 경험하는 시간이 익숙한 듯하면서도 독특합니다. 나진은 다혜와 재회한 후 함께 겨울, 봄, 여름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15년 전 다혜와 헤어지던 이별의 순간으로 자주 돌아갑니다. 나진과 다혜의 이별 장면은 이들의 “복수심과 죄책감을 매개로 이어지는 진실 게임”(은모든 소설가)의 출발점이기도 하지요. 나진이 현재 다혜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에 따라 같은 기억도 다르게 느껴지고요. 어떻게 이런 구조를 구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과거가 현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써 보고 싶었어요. 평소에도 저는 과거를 자주 떠올리는 사람이고,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가 종종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담아낸 소설은 한 번도 쓰지 않았더라고요. 그리고 15년이라는 기간이 인물의 특정한 나이에 적용되었을 때 시간의 간극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궁금했어요. 나진과 다혜가 처음 만났을 땐 각각 23세와 15세였는데, 재회했을 땐 38세와 30세가 되어 있죠. 대학생 혹은 사회 초년생인 23세와 중년에 진입하는 목전인 38세는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과 성격이 확연히 달라져요. 마찬가지로 15세와 30세는 청소년의 중간 지점과 청년의 복판을 지난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기이고, 겉모습만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도 변화가 커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그런 특징들에 매력을 느꼈어요. 

 

다혜는 독특한 캐릭터예요. 처음에 다혜는 현재에 충실하고 우발적이거나 충동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처럼 보여요. 그러는 한편 과외 선생님이었던 나진에 대한 복수심을 15년 동안이나 품는 인물이기도 하죠. 다혜라는 인물을 어떻게 상상하게 되었나요?

소설을 쓸 때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아요.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의 총체만으로 소설을 쓸 수는 없고, 그 경험을 내면화하면서 어떤 생각들을 덧붙여 잘 보관해 두었는지가 중요할 테고요. 다혜는 10대 시절의 제가 가지고 있던 성향과 주변에서 받은 영향이 스며든 인물일 거예요. 20대였던 나진과는 다르게 시작점이 15세였던 것도 중요한 점인데, 그 시기의 성격적 특징들이 서사적으로 완결된 한 편의 이야기에선 성인이 된 뒤에도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점을 다혜의 복잡한 심리적 층위를 보여 주는 방식으로 끌고 가자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실제론 제가 다혜에게 끌려간 적이 더 많아요. 이번 소설은 인물들에 대한 통제를 그 어느 때보다 약하게 했고,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옮겨 다닐 수 있는 자유를 줬어요. 그래서인지 다혜는 ‘성은자’와 더불어 저에게도 의문이 남은 인물입니다.

 

다혜를 만난 후 평온했던 나진의 삶에 불행이 밀려듭니다. 전세 사기로 전 재산을 날리고, 회사에서는 엉뚱한 소문이 돌아 그만두게 되죠. 다혜의 등장과 함께 불행들이 무차별적으로 몰려든다는 점이 현실적으로 와닿기도 했어요. 우리가 경험한 삶의 불행들이 대개 그렇게 오는 것 같거든요. 

제가 자주 꾸는 꿈이 있어요. 바닷가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다 갑자기 해일이 밀려와 정신없이 도망치는 꿈이죠. 꿈 해몽을 검색해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상황이 도래한다고 나와요. 왜 이런 꿈을 자주 꾸는지 생각해 봤어요.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불행이 연이어 닥치는 거더라고요. 두 가지 불행만 겹쳐 일어났을 뿐인데도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어서일까요. 아마 무의식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나진에게 일어난 불행도 처음엔 직장과 집에서의 사건, 단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곧 나진의 삶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일이 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삶이란 두 장의 카드를 맞대어 비스듬히 세워 놓은 상태인지도 모르겠어요.

 

회사 동료인지 원수인지 모를 ‘이상우’ 뿐 아니라 ‘팀장’과 ‘한 대리’, 이사한 집에서 만난 노인 등 다양한 인물들이 ‘나진’과 맺는 관계가 세밀하게 그려지는데 그 모양이 저마다 달라서 몰입하게 됩니다. 생동감 넘치는 인물 관계는 작가님 소설의 매력이기도 한데, 그 비결이 궁금합니다.

저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잘 느껴요. 아마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일기장에 사람들에 대한 별의별 생각을 길게 적어 놓으며 살았을 것 같아요. 제 감정을 자극한 사람만이 아니라 길을 걷다 우연히 본 사람, 지하철에서 맞닥뜨린 사람도 저의 눈길을 끌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간혹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나도 조금 이상해져도 괜찮을 것 같아서 묘하게 안심하게 되고요. 얼마 전엔 낯선 동네를 걷다 검은색 일회용 면 용기를 모자처럼 쓴 할머니를 본 적이 있어요. 처음엔 저도 멋진 모자로 착각했을 만큼 정말이지 잘 어울렸고, 본인도 그걸 아는지 모델처럼 당당하게 걸으셨어요.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기뻐요. 왜 그런 행동을 했을지 생각해 보는 과정이 좋고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우리 착한 나진』을 출간한 뒤엔 미흡할까 봐 도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많이 내려놓게 되었어요. 그래서 앞으론 다양한 소재와 형식의 소설을 써 보고 싶어요. 그러나 뛰어난 소설가를 목표로 삼기보다는 머리에 엉뚱한 물건을 쓴 채로 거리를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이의 마음을 오래 짐작해 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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