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가 보내는 불온한 현실로의 초대장 ‘실낙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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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가 보내는 불온한 현실로의 초대장 ‘실낙원’ [인터뷰]

스포츠동아 2026-10-19 07:56:2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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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CJ ENM 장

사진제공 | CJ ENM 장


[스포츠동아 장은지 기자] 2인 인터뷰

인공지능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은 도무지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불완전한 심연에 있다. 기술이 고통과 상실마저 봉합해 주는 시대,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무결한 해답에 안주하는 것은 과연 구원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영화 ‘실낙원’은 9년 전 사고로 잃은 아들을 AI로 복원해 위태롭게 살아가던 한 엄마 앞에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나타나며 시작되는 비극을 그린다. 가짜 아들을 향한 기이한 애착과 진짜 핏줄을 향한 섬뜩한 경계심, 완벽한 가짜와 오염된 진짜의 충돌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실존적 물음을 거침없이 밀어붙인다.

이 시대 가장 박력 있는 사색가 연상호와 인물의 심연을 파고드는 실연자 김현주. 영화 ‘실낙원’은 안온한 가짜 낙원에 취한 이들에게 두 사람이 보내는, 불온하지만 매혹적인 현실로의 초대장이다.

사진제공 |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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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는 엔드 크레딧이 오르며 다시 담론이 시작되는 영화이고, 담론은 대개 불편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연상호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재주가 탁월한 연출가다.

그가 요즘 천착하는 질문의 주제는 ‘인간다움’이다. 지난 5월 선보인 ‘군체’는 집단지성으로 동기화되는 좀비를 통해 인공지능(AI) 시대에 대한 고민을 깔고 있었다. ‘군체’의 안타고니스트는 개인의 의지나 사유와는 역행하는 ‘하나로 동기화되는 집단성’이야말로 인류의 진화라 여기는 인물이다. 여기서 좀비는 AI가 전개하는 논리와 보편성에 획일화되며 개별성을 상실해 가는 인간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새 작품 ‘실낙원’에서는 그 물음을 한층 거침없이 밀고 나간다. 제목을 따온 존 밀턴의 대서사시 ‘실낙원’은 이브가 선악과를 베어 물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이야기다. 그로부터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로 거듭나고 온갖 죄와 고통이 먹구름처럼 몰려든다. 깨벗고 있던 몸에 불현듯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때부터다.

그러나 연상호는 낙원과 실낙원을 완전히 거꾸로 읽는다. ‘사색’이야 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정체성이라고 믿는 그에게, 사색이 필요치 않은 AI 시대는 오히려 멀어져야 할 ‘낙원’이다. 영화 ‘실낙원’은 일원화된 유토피아로부터 달아나려는 투철한 사색가 연상호의 투쟁, 그리고 집요한 탐구의 결실이다.

사진제공 |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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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세 장짜리 글에서 시작됐죠”
‘실낙원’은 그의 어머니가 쓴 세 페이지 분량의 단편에서 출발했다. 온 마을이 손가락질하는 악한 아들을 품고 스스로 소멸을 택한 엄마의 이야기다. 연 감독은 “도대체 어머니가 무슨 심리로 이런 글을 썼는지 왜 아들인 내게 보여줬는지 그 생각을 집요하게 따라가 보고 싶었다”고 돌이켰다.

모성을 쫓던 시선은 자연스레 AI 시대의 실존적 질문과 맞닿았다.

“AI는 보편적 집단지성의 총합이라 1초 만에 논리를 완성해 버려요. 논리로는 인간이 절대 이길 수 없죠. 결국 인간성은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실존적 선택에서 온다고 봤습니다. 극 중 소영의 선택을 명확한 논리로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그 감정을 가슴으로 이해할 법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그 알 수 없는 마음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죠. 그게 지금 AI 시대에 우리가 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어요.”

AI 기술은 오늘날 영화를 비롯한 예술계 전반에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고도 있다. 연 감독은 창작물의 영역까지 깊숙이 파고든 AI에 대해서도 진단했다. AI를 ‘보편성의 합’, 예술 산업을 ‘독창성의 영역’이라 정의한 그는 “그렇다면 과연 보편성이 독창성이 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던졌다.

“미술계에는 보편성과 독창성에 대한 담론이 이미 오래 전에 있었죠. 작가가 자기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예술이라고 했는데, 그럼 공장에서 찍어낸 게 과연 예술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거든요. 앞서 마르쉘 뒤샹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변기를 ‘샘’이라 이름 붙이면서 다다이즘이 시작됐죠. 저는 그 맥락과도 비슷하다고 봐요. 아무리 보편성의 합이라도 어떤 독창성이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본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AI가 앞으로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죠.”

이와 관련한 유쾌한 여담도 덧붙였다. 해외 영화제에서 유독 이런 질문을 많이 받게 되는데 유럽에 가서는 ‘마르셀 뒤샹’, 미국 가서는 ‘앤디 워홀’로 맞춤형 답변을 한다며, 특유의 재치있는 입담을 드러냈다.

사진제공 |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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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은 결핍에서 탄생한다”
‘실낙원’은 2억 원으로 110억 원의 매출을 올렸던 전작 ‘얼굴’을 잇는 2번째 저예산 프로젝트다. 정산 시스템을 정교하게 다듬으며 5억 원으로 규모를 불렸지만, 여전히 상업 영화 스태프가 모여 즐겁게 찍는 ‘동아리 활동’의 활기를 지향한다.

‘상업 영화감독’으로 불리는 게 아직까지 어색하다는 그는연 감독은 어쩌면 영화의 미학이란 ‘결핍’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에게 근사한 롱테이크의 비결을 묻자 돌아온 의외의 답이 촉매가 됐다.

“빨리(급하게) 찍으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결핍된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야만 가능한 영역이 있죠. 카메라 한 대로 찍어야 하는 팀은 어떻게든 한 대로 승부를 보지만, 두 대를 들고 가면 ‘일단 건지고 보자’는 안일함에 롱테이크의 긴장감이 살아나지 않거든요. 영화 ‘벼랑 끝의 남매’를 단 2500만 원으로 찍은 카타야마 신조 감독도 영향을 줬죠. ‘가스인간’을 함께 했는데 ‘그는 나를 상업 영화 도련님으로 보겠구나, 제대로 한번 보여줘야겠다’는 질투와 창작욕이 발동하면서 이런(저예산) 작업들이 자연스레 이어지게 된 것 같아요.”

유능한 스태프들을 저예산 영화로 유도하는데도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연 감독은 저예산 영화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회차라고 했다. 그가 세운 절대적인 원칙은 바로 ‘14회차’(약 2.5주)라는 시간적 마지노선이다. 4주, 즉 한 달이 넘어가는 순간 배우와 스태프 모두에게 심리적 부담이 가중되지만, 2.5주는 “가볍게 한번 쓱 뭉쳐보자”며 뛰어들 수 있는 절묘한 호흡이라는 계산이다. 14회차를 넘기지 않기 위해 시나리오에서 삐져나오는 군더더기는 가차 없이 압축하거나 덜어냈다.

영화 ‘실낙원’은 ‘얼굴’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지만 다만 전작의 성공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욕심에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얼굴’이 잘됐다고 해서 그 성공을 재현하겠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그건 ‘도박’이 돼요. 이 라인(저예산 프로젝트)은 도박이 아닌 창작을 위해서 가동하는 거예요.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대중성을 발견하기 위한 창작 라인이 되어야죠.”

‘얼굴’만큼의 흥행을 바라지 않지만, 그럼에도 앞으로도 저예산 프로젝트를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목표는 있다. 연 감독은 손익분기점의 숫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면서도, “딱 50만 명만 봐준다면 스태프들과 곧바로 삼겹살 파티를 열고 싶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장은지 기자 eun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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