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시골 마을 얼마라. 아버지 가게를 보던 열여섯 살 올윈 그린(Olwyn Green, 1923~2019)의 눈앞에 훤칠한 군인 하나가 나타난다. 이름은 찰리 그린(Charlie Green, 1919~1950). 두 사람은 말 한마디 못 나누고 헤어졌지만, 2년 뒤 전선에서 만년필을 보다 그녀를 떠올린 찰리가 편지를 보내면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1943년 결혼, 1947년 딸 안띠아 출생. 그런데 남편은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오가느라 집에 붙어 있던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1950년 11월 1일, 남편 찰리는 정주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세상을 떠난다.
남편이 죽었을 때 올윈은 스물일곱, 세 살배기 딸을 안고 있었다. 열세 살에 학교를 그만둔 터라 배운 것도 기술도 없었다. 석 달 뒤 그녀는 딸과 홀어머니, 남동생을 데리고 시드니로 이사한다. 이 이사 덕분에 남동생은 대학에 진학해 훗날 교수가 됐지만, 정작 올윈 자신은 생계를 책임지며 뒤늦게 고등학교 과정을 마쳐야 했다. 전쟁미망인을 지원하는 자선단체의 도움을 받아 1958년에야 시드니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딴다. 그리고 이후 20년 넘게 영어교사로 일한다. 남편이 훈장을 받는 동안 아내는 학위를 받은 셈인데, 국가는 전자에는 열심이었고 후자에는 무심했다.
1979년 교직에서 물러난 올윈은 유럽에서 몇 해를 보내다, 문득 남편의 군대생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공부하는 일만큼 즐거운 게 어디 있겠느냐며 그녀는 다시 학교 문을 두드린다. 처음엔 글쓰기 과정 하나로 시작한 작업이 12년에 걸친 자료조사로 불어나, 1993년 마침내 남편의 전기 『이름은 아직도 찰리』가 나온다. 책을 쓰고 나니 이번엔 한국전쟁 자체를 너무 모른다는 사실이 걸렸다. 통상 요구되는 우등학사 학위도 없이 일반학위로 매쿼리대학교 대학원 연구과정에 받아들여진 그녀는, 일흔여섯 나이에 '잊힌 전쟁'을 주제로 박사과정까지 밟는다. 열세 살에 그만둔 학업을 일흔 넘어 박사과정으로 되갚은 셈이다.
2000년 무렵 올윈은 한국전쟁 발발 반세기가 지나도록 호주사회가 이 전쟁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빅토리아주 시골마을 여성들의 손바느질 모임에 부탁해, 한국전쟁에서 숨진 호주 군인 339명의 이름을 새긴 누비이불 제작을 이끈다. 2003년 한국전쟁 정전 50주년에 맞춰 공개된 이 이불은 호주전쟁기념관 기준에는 맞지 않아 오히려 여기저기를 떠돌다, 결국 부대박물관에 자리 잡았고 훗날 한국의 유엔군관련 기념시설로까지 옮겨간다. 국가의 공식기념관이 받아주지 않은 기록을, 시민들의 바느질이 결국 국경너머까지 실어 나른 셈이다. 2006년 호주정부는 이런 공로를 인정해 그녀에게 훈장을 준다. 훈장문구는 "군사(軍史)를 기록하고 보존하며 참전용사와 그 가족을 돌본 공로"였다.
2019년 7월, 죽기 몇 달 전 올윈은 남편 찰리가 한국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추서 받는 소식을 듣는다. 당시 국무총리 이낙연(1952~)이 올윈의 손자에게 직접 훈장을 전달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7일, 아흔여섯의 올윈은 세상을 떠난다. 4년 뒤인 2023년 9월,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백 살이 됐을 생일에 맞춰 유해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의 남편 곁으로 옮겨진다. 헤어진 지 73년 만의 합장이다.
국가가 세운 기념비보다 한 개인이 30년 걸려 쓴 책과 시골 아낙들의 손바느질이 더 오래, 더 정확하게 기억을 남기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본다. 한국 역시 전쟁과 국가폭력의 기억을 정작 국가보다 유가족과 시민이 앞장서 붙잡아 온 역사가 길다. 진상규명도, 증언채록도 결국 힘없는 이들의 몫이었던 적이 많다. 올윈이 남편의 죽음을 이해하려 평생을 바친 끝에 얻은 결론은 결국 하나다. 기록되지 않으면 국가도, 훈장도, 심지어 전쟁자체도 그저 잊힌다는 것.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지만, 그 법정에 꾸준히 차곡차곡 증거를 쌓아 올리는 이는 언제나 국가가 아니라 <친일인명사전>과 <반헌법행위자열전>처럼 씨알 한 사람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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