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 국민의힘 김태규 의원이 "우리 '부엉이 바위의 진실'이나 하나 만듭시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전두환의 쿠데타가 "내란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김태규 의원의 영화 <암살자(들)>에 대한 '미러링'이다. 검찰 출신인 무소속 한동훈 의원은 확정되지 않은 노무현의 과거 범죄 혐의를 언급하며 이것을 '노무현 성역 부수기'라는 십자군 전쟁으로 격상시켰다.
두 사람의 태도는 맥락을 달리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진보 진영의 성역 노무현을 이참에 부수겠다'는 것이다.
<암살자(들)> 논란이 벌어지자 극우 진영은 '노무현의 논두렁 시계' 같은 밈을 열심히 돌린다. '박정희를 조롱해? 그렇다면 노무현 조롱도 허용하라'는 것이다. 특히 노무현의 죽음을 다룬 음모론적 영화를 만들면 어떠냐는 논리는 겉으로 보면 참 그럴듯해 보인다.
그들이 좋아하는 '팩트 정리'부터 해보자. 박정희는 독재자고, <암살자(들)>은 독재시대의 부조리를 그려낸 '픽션'이다. 전두환은 독재자고 광주에서 민간인 수백명을 학살했다. 노무현은 전두환 독재에 맞선 사람이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인이며 이명박 정권 하에서 검찰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팩트의 경중과 위계를 무너뜨리려는 게 김태규와 같은 '극우 진영'을 대변하는 자들의 목표다. 쉽게 말해 김태규는 '박정희 조롱'의 부당함을 어필하려는 게 아니라, 노무현의 개인적 비극을 끌어들여 '독재 시대 대통령'과 '민주주의 시대 대통령'이 갖고 있는 역사적 책임의 '위계', 혹은 역사적 평가의 '경중'을 해체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위험한 것은 사람들이 박정희나 전두환을 옹호하게 되는 게 아니라, 박정희나 전두환의 국가폭력을 다른 '정치적 잘못'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박정희와 노무현, 전두환과 이재명, 5·18 민주화운동과 운동권 정치를 비교하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런 게 금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비교가 성립하려면 무엇을 기준으로 비교하는지부터 명확해야 한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국가 폭력을 가한 독재자다. 그런 사람과 민주화운동가, 시민운동가 출신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논란을 단순히 '둘 다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인물'이라는 이유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물론 노무현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모든 정치적 책임을 면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노무현 정부를 역사적으로 같은 성격의 체제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박정희와 노무현을 병렬로 두고 동일시하는 건, 두 체제의 차이를 평면화시킨다.
<암살자(들)>에 '부엉이 바위'를 들이미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김태규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성역을 부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전두환 내란'과 같은 국가 폭력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부정하고 '노무현의 죽음'을 끌어들여 진영 싸움으로 격하시키는 건 성역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책임을 희석하는 행위다. 두 인물을 형식적으로 교환하는 미러링은 '역사적 평가'라는 구별을 의도적으로 지운다.
이 문제는 단순한 표현의 자유 논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독재자'라고 부를 것인가, 어떤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기억할 것인가, 어떤 죽음을 '국가폭력의 희생'으로 규정할 것인가는 언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사회가 권력과 폭력, 저항과 희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사회는 모든 행위를 똑같이 평가하지 않는다. 합법적인 정치적 경쟁과 군사쿠데타를 구별하고, 일반적인 정책 실패와 조직적인 국가폭력을 구별한다. 이 구별은 특정 정치세력의 성역을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허용할 수 있는 권력 행사의 범위를 규정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행사의 홍보 문구는 5·18 당시 군사적 진압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5·18은 단순히 1980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와 유가족, 민주화운동 참여자, 그리고 그 역사를 기억하는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집합기억이다. <암살자(들)>의 주된 주제 역시 암울했던 '박정희 독재 시기'의 국가 폭력에 대한 집합 기억이다.
역사적 기억은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다. 사회집단의 관계와 규범 속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도 일종의 '건드려서는 안 되는 가치'가 있다. 인간의 존엄, 시민의 기본권, 고문과 학살의 금지, 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 같은, 오랜 시간 인류가 축적해 온 '합의'들이다. '탱크데이는 안 되고 <암살자(들)>은 되느냐'는 극우 진영의 논리는 역사적 평가와 사회의 합의를 '표현의 자유'같은 단순한 문제로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다. 성역 부수기 담론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노무현이라는 인물은 논쟁적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독재나 전두환의 독재와 결코 비교될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노무현의 신성함을 지키려는 게 아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한 평가의 장에, 굳이 관계도 없는 노무현을 끌어들여 결국 노무현의 '형사 범죄 행위'를 '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의 국가 폭력 행위'와 동등한 걸로 착각하게 만들고, 사안의 경중을 지워버리는 '극우 진영'의 태도가 문제다.
그들은 5.18 같은 '사회가 합의한 규범'마저 '기득권이 강요하는 금기'로 재해석한다. 그 금기를 위반하는 행위 자체를 정치적 용기의 증거로 만든다. 그리고 그걸 '성역 부수기'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을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용감한 반항자를 자처한다. 전형적인 반엘리트주의적 포퓰리즘이다.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가 '닉슨 재평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우연이 아니다.
정치의 평면화, 어차피 다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인식, 사회적 합의에 침을 뱉고 그걸 진영 간 호불호 대결로 축소시키는 것, '이 비유가 정말 타당한가?'보다 '이 비유로 상대를 화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중요시하는 태도. 그 속에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사라지고, 오직 누가 더 위선적인가를 겨루는 정치적 공방만 남긴다. 이게 그들의 전략이다.
물론 영화 <암살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도 육영수 여사 피격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방식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비판을 무조건 정치적 공격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적 해석의 자유, 피해자에 대한 존중, 표현의 윤리를 서로 구별하면서 논의하자는 것이다. <암살자(들)>에 '부엉이 바위의 비밀'로 대꾸하는 저 천박한 방식을 버리자는 것이다.
내친김에 상상해보자. 노무현의 죽음을 다룬 영화를 만든다? 아마도 한나라당 집권 이명박 시대의 '검찰 정치'와 관련된 흑역사가 주 재료가 될 것 같다. 백번 양보해 만약 극우 음모론자들의 주장대로 '노무현의 죽음에 운동권의 음모가 있다'는 수준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치자. 상식적으로 투자나 제대로 될까? 관객이 그런 걸 보겠다고 나설까? '상식'의 문제다. 한번 마음껏 추진하고, 만들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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