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한층 넓어진 지평 위에서 서른한 번째 축제의 서막을 연다. 세계 영화계를 이끄는 거장들의 신작과 비범한 신예들의 수작부터 영화가 남긴 발자취를 되짚고 동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까지, 올해 부산을 채울 다채로운 영화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열흘간 이어질 영화의 향연 속에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저마다의 한 장면을 품어가길.
모든 날의 양자경
WRITER 차한비(영화 기자)
배우 양자경은 시기와 장소, 배역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의 폭을 넓혀왔다. 1985년 <예스 마담: 황가사저>에서 그는 남성 영웅의 옆자리가 아닌 사건의 한 가운데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했다. 홍콩 액션영화는 배우 양자경을 통해 여성의 몸을 서사를 움직이는 힘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007 네버 다이>와 <와호장룡>을 통해 활동 무대를 확장했다. 무협과 첩보물, 가족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주연과 조연을 두루 맡았고, 여성 배우에게 으레 따라붙는 고정관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배역 선택의 폭을 넓혀갔다. 그렇기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순간은 갑작스러운 이변이 아니었다. 아시아 여성 배우가 장르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중년 이후에도 거대한 서사를 이끌 수 있음을 40여 년에 걸쳐 입증한 결과였다. 시대가 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이 아니라, 그가 도착한 곳마다 시대가 그어놓은 경계가 조금씩 뒤로 밀려난 셈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양자경에게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여하고, 특별기획 프로그램 <모든 시간 모든 곳의 양자경>을 마련한다. 수상자의 대표작을 영화제가 일방적으로 선정하는 대신 양자경에게 직접 작품 선정을 맡겼다. 그가 고른 영화는 <검우강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산디와라>다. 여기에 바이 슈에 감독의 신작 <우리 할머니는 큐브왕>이 합류한다. 네 편을 통해 양자경이 지나온 시간뿐 아니라 어떤 장소와 얼굴을 선택해왔는지 살펴볼 수 있다.
<검우강호>에서 양자경이 연기한 증정은 과거를 버린 채 평범한 생활을 꿈꾼다. 살수로 단련된 몸은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는 중에도 이전의 시간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양자경은 칼을 잘 쓰는 사람의 위력보다 칼을 내려놓고 싶은 사람의 피로와 바람에 무게를 둔다. 폭력을 끝내려던 인물이 다시 싸워야 할 때 드러나는 망설임까지 액션의 일부로 만드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션 베이커 감독의 11분짜리 단편 <산디와라>는 말레이시아 페낭의 야시장을 무대로 삼는다. 양자경은 푸드 크리에이터와 셰프, 가수, 평론가, 종업원까지 다섯 인물을 혼자서 연기한다.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양자경의 유머와 변신 능력을 만날 수 있는 경쾌한 작품으로, 세계 곳곳을 누벼온 배우가 고국의 거리에서 한껏 장난스러워지는 모습이 유독 반갑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에블린은 세무조사와 가족 문제에 시달리던 중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무수한 삶과 접속한다. 평행 세계를 살아가는 여러 에블린은 양자경이 실제로 거쳐온 배역들을 떠올리게 한다. 무술 액션과 코미디, 가족 드라마가 한 인물 안에서 충돌하고 뒤섞이는 이 영화는 그의 경력을 집약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작 <우리 할머니는 큐브왕>은 양자경을 또 다른 시간대로 데려간다. 사기 사건으로 집을 잃고 양로원에 들어간 자오는 한때 매직큐브 챔피언이던 청년에게 큐브를 배우기 시작한다. 위기에 처한 노인 여성이 보호와 구제의 대상으로 남는 대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경쟁하는 선수로 발돋움하는 이야기다. 양자경은 자오를 연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제작도 총괄했다. 주어진 배역을 수행하는 배우에서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지 결정하는 제작자로 영역을 넓혔다는 뜻이다. 그렇게 양자경은 여전히 다음 단계로 향하고 있다. 과거를 감춘 검객, 야시장의 다섯 인물, 무수한 우주의 에블린, 뒤늦게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자오. 이 얼굴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 살지만, 지금의 자신을 완결된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양자경에게 전성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아직 만나지 않은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현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