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자들' 논란으로 배우 신변에 대한 위협이 우려되는 가운데 영화인들이 나섰다.
8일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치러지고 있는 가운데 영화인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영화를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말고, 관객의 판단을 정치가 대신하지 말라"는 공동입장을 발표했다.
정지영·이명세 등 20여명 긴급회견...비평의 영역 넘어서면 안돼
정지영·이명세·김홍준 감독,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윤성은 영화평론가, 백재호 감독, 전찬일 영화평론가 등이 참여한 기자회견에서 영화인들은 "영화에 대한 비판과 역사적 해석을 둘러싼 논쟁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논쟁의 범위가 단순 평가를 넘어 감독과 배우, 제작사와 투자기관, 공공기관, 극장과 학교, 해외영화제의 상영 문제로까지 확대되는 상황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어 "작품을 충분히 보거나 사실관계를 확인하기도 전에 영화의 제작 의도와 정치적 성격을 먼저 규정하고, 그 판단을 토대로 감독과 배우, 제작사, 투자기관, 공공기관, 극장과 영화제까지 계속 새로운 책임의 대상으로 확대하는 방식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어제 열린 국정감사에서도 이 영화를 둘러싸고 감독과 제작진의 출석 문제, 투자와 지원 과정, 작품의 내용과 역사적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다. 공적 권한은 정치적 압박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국정감사는 구체적인 사실과 근거를 바탕으로 정부와 공공기관의 책임을 묻기 위한 제도"라며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먼저 제기하고, 이를 근거로 자료요구와 증인 요구, 조사 대상과 책임의 범위를 계속 확대해 민간의 투자와 상영, 문화기관의 판단 영역까지 압박하는 방식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장이머우 감독 "역사적 진실도 논쟁 있을 수 있어"
앞서 지난 7일 부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은 중국의 거장 장이머우 감독은 "'암살자들'은 보지는 못했으나 이야기는 들었다”며 “창작은 창작이며 꼭 진실과 사실에 기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역사적인 진실이라는 것도 그 자체가 정말 진실인가 논쟁이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역사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이라며 “영화를 본 뒤 관객이 느끼는 것이 다 다르고, 다른 관객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영화의 매력”이라고 밝혔다.
장 감독은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등을 받은 거장이다.
함께 심사에 참여한 '다음 소희' 정주리 감독도 "영화는 영화"라며 "요즘 제가 느끼는 감정은, 영화는 영화고 어쨌건 간에 허구의 이야기이며, 등장인물 역시 허구의 인물이 된다는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영화가 어디서 시작되고 길어 올려졌든 간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진다.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이기 때문”이라며 “비판과 공감 등 다양한 의견을 들으며 영화를 만드는데, 그 작업을 계속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라고 말했다.
또한 국민의힘 측으로부터 영화 '암살자들' 상영 자제 요청을 받은 싱가포르국제영화제 측은 지난 7일 공식 입장을 통해 "개막식으로 선정된 '암살자(들)'의 상영은 변동없이 진행한다"고 밝혔다.
'암살자들' 배우 신변 위협 우려...부산영화제 일정 취소
한편 '암살자들' 배우는 신변 위협에 따라 부산국제영화제 일정을 전면 취소했다.
지난 2일 부산국제영화제는 "‘암살자(들)’ 제작사의 요청에 따라 예정돼 있던 제31회 부산영화제 개막식 참석·야외무대인사 일정이 취소됐다”며 "관객·게스트들의 안전과 원활한 행사 진행을 고려한 제작사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밝혔다.
이어 "관련 일정을 기다려 주신 관객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다음은 영화인 공동입장문 전문.
영화를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마십시오
관객의 판단을 정치가 대신하지 마십시오
최근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이 작품에 대한 평가의 범위를 넘어 정치권과 공공기관, 투자기관, 극장과 학교, 해외영화제의 상영 문제로까지 빠르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비판과 토론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이라면 더욱 치열한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논쟁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넘어 정치적 정쟁의 도구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합니다.
작품을 충분히 보거나 사실관계를 확인하기도 전에 영화의 제작 의도와 정치적 성격을 먼저 규정하고, 그 판단을 토대로 감독과 배우, 제작사, 투자기관, 공공기관, 극장과 영화제까지 계속 새로운 책임의 대상으로 확대하는 방식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영화를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은 누구의 몫입니까.
영화 제작진에게 관객을 가르치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영화를 보지 않은 채 작품의 의미와 의도를 먼저 규정하고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하는지까지 정치가 판단하려 한다면, 누가 관객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또한 국정감사와 자료요구 등 공적 권한의 사용에도 분명한 원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열린 국정감사에서도 이 영화를 둘러싸고 감독과 제작진의 출석 문제, 투자와 지원 과정, 작품의 내용과 역사적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국정감사는 구체적인 사실과 근거를 바탕으로 정부와 공공기관의 책임을 묻기 위한 제도입니다.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먼저 제기하고, 이를 근거로 자료요구와 증인 요구, 조사 대상과 책임의 범위를 계속 확대해 민간의 투자와 상영, 문화기관의 판단 영역까지 압박하는 방식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공적 권한은 정치적 압박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사안과 관련해 어떤 사실과 근거를 바탕으로 국정감사와 자료요구가 이루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쳐 그 대상과 범위가 확대되었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인들은 공개된 자료와 적법한 절차를 통해 그 과정과 근거를 계속 살펴볼 것입니다.
공적 권한을 통해 문제를 제기했다면, 그 문제 제기가 어떤 사실과 근거에 기초했는지 역시 설명될 수 있어야 합니다.
국내의 정치적 논쟁을 해외영화제의 독립적인 작품 선정과 상영 결정에까지 확대하는 것 역시 신중해야 합니다.
싱가포르국제영화제는 10월 7일 공식입장을 통해 외부의 논란과 요구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프로그래밍 과정을 통해 선정한 〈암살자(들)〉을 예정대로 개막작으로 상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영화제의 역할은 관객들이 다양한 이야기와 관점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밝혔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원칙입니다.
어떤 작품을 선정하고 상영할 것인지는 영화제의 독립적인 판단 영역이며, 그 작품을 볼 것인지 말 것인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관객이 결정할 일입니다.
이미 이 논쟁의 과정에서 영화 관계자 개인의 신상이 공개되고, 주거지와 일상이 침해되며, 협박과 신변 위협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영화에 대한 비판이나 정치적 의견 표현과는 명백히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특정 영화에 찬성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찬성이든 반대든, 정치가 작품의 의미와 관객의 판단을 대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화를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마십시오.
공적 권한을 정치적 압박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관객이 직접 보고 판단할 기회를 남겨주십시오.
정치가 한 걸음 물러나고,
관객에게 판단의 자리를 돌려주십시오.
2026년 10월 8일
대한민국 영화인 일동
[폴리뉴스 백윤호기자]
Copyright ⓒ 폴리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