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기와지붕 아래 조용한 한옥 마당이 나온다. 미국 여행 전문지 콘데나스트 트래블러 독자들이 서울을 '세계 최고의 대도시'로 꼽은 이유를 따라가 보면 결국 이 같은 '반전'에 닿는다. 올해로 39회째를 맞은 이 매체의 '리더스 초이스 어워드' 대도시 부문에서 서울은 지난해 5위에서 단숨에 정상까지 뛰어올랐다. 도쿄의 독주를 멈춰 세운 서울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올해 1~8월 한국을 찾은 외래객이 1504만8435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21.6% 증가하며 같은 기간 기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사진은 5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 뉴스1
8일 서울시에 따르면 미국 여행 전문지 콘데나스트 트래블러가 최근 발표한 ‘2026 리더스 초이스 어워드’의 ‘세계 최고의 대도시’ 부문에서 서울이 1위를 차지했다.
"역사와 현대가 매혹적으로 뒤섞인 곳"
콘데나스트 트래블러가 서울을 눈여겨본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 매체는 지난해 9월 서울 소개 기사에서 역사와 현대, 자연과 첨단기술, 합리적인 선택과 고급 경험이 한 도시 안에 공존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K팝과 K뷰티, K드라마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서울을 인기 관광지로 키웠다는 분석도 담겼다. 매체는 그 화려함 이면에 2000년 넘게 쌓인 깊고 복합적인 역사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보다 앞선 2024년 3월에는 공식 X(옛 트위터) 계정에 서울을 "도자기 갤러리와 아늑한 국숫집부터 궁궐 같은 호텔까지, 역사와 현대가 매혹적으로 뒤섞인 곳"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독자들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 투표에 참여한 독자들은 처음엔 K팝과 K드라마, 스킨케어에 끌려 서울을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서울을 오래 기억하게 만든 건 도시 곳곳의 대비였다고 했다. 네온 불빛이 가득한 스마트 지구에서 전통 한옥이 둘러싼 고요한 안마당으로 한 동네 안에서 순식간에 장면이 바뀐다는 것이다.
K-컬처가 서울로 사람을 불러 모으는 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건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다. 이 작품은 지난 3월 열린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을 받았다. 속편도 만들어진다. 유럽 매체 유로뉴스는 영화 속 장소를 직접 찾아가는 '셋제팅(set-jetting)' 여행객이 서울로 몰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로뉴스는 이 작품이 팬들의 관심을 K팝에서 한국 전통문화와 뷰티 의식 전반으로 넓혔다고 전했다.
추석연휴 마지막날인 9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이 나들이 나온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 뉴스1
유로뉴스는 작품 속 명소도 하나하나 짚었다. 주인공들의 옥상 데이트 장면이 펼쳐진 북촌한옥마을은 여행 플랫폼 트립닷컴에서 서울 인기 투어로 떠올랐다. 오프닝을 장식한 코엑스 케이팝 스퀘어, 노래 '소다 팝' 장면의 무대인 명동, 밤 산책과 전투 장면이 그려진 낙산공원 성곽길도 순례 코스가 됐다. 클라이맥스 결전이 벌어진 N서울타워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다. 국립중앙박물관 기념품 가게에는 공식 굿즈를 사려는 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분주한 외국인 발걸음, 활짝 열린 외국인 지갑
발걸음은 숫자로 이어졌다. 유로뉴스는 정부 통계를 인용해 영화 공개 다음 달인 지난해 7월 한 달에만 외국인 관광객 136만명이 서울을 찾았다고 전했다. 1년 전보다 23.1% 늘어난 수치다. 블룸버그 집계로는 영화 공개 뒤 몇 달 동안 한국행 항공권 예약이 25% 늘었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890만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영화 속 장면에 등장한 찜질방의 인기도 뛰어올랐다. 여행 플랫폼 크리에이트립 집계에 따르면 영화 공개 뒤 여름철 찜질방 세신 예약은 직전 봄보다 115% 늘었다.
지갑도 활짝 열렸다. 서울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서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823만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3% 늘었다. 이들이 서울에서 카드로 쓴 돈은 5조6172억원으로 56.8% 증가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쓰임새를 보면 쇼핑이 46.4%로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의료·웰니스가 24.4%, 식음료가 13.1%, 숙박이 10.7%였다. 대형 쇼핑몰에서 쓴 돈은 7063억원에서 1조2234억원으로 73.2% 뛰었다. 의료관광 지출은 5563억원에서 9084억원으로 63.3% 늘었다. 식당 지출은 54.5%, 뷰티 지출은 40.0% 증가했다. 콘데나스트 트래블러가 서울의 강점으로 꼽은 웰니스와 뷰티, 미식이 실제 소비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지역별로는 강남구가 외국인 카드 소비의 29.3%, 명동이 있는 중구가 28.4%, 홍대 일대를 품은 마포구가 7.3%를 차지했다.
서울시 강북구 북한산 백운대 탐방로에서 외국인들이 단풍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뉴스1 자료사진
축제장도 외국인으로 북적였다. 지난봄 열린 '서울 스프링 페스타 2026'에는 706만명이 다녀갔다. 이 가운데 외국인이 117만명이었다. 여행 방식도 한층 다양해졌다. 여의도 상공에 떠오르는 계류식 가스기구 '서울달' 탑승객 가운데 외국인 비중은 지난해 40.2%에서 올해 상반기 43.6%로 높아졌다. 올해 상반기 서울도보관광에는 약 4만6000명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약 1만6000명이 외국인이었다. 한강버스 선착장 매점 매출은 1년 전보다 257% 늘었다.
외국인들이 '진짜 서울'을 찾아 방문한 골목
외국인들이 '진짜 서울'을 찾아 방문한 골목도 따로 있다. 영국 문화·여행 전문매체 타임아웃은 지난달 종로3가를 '2026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동네' 1위로 꼽았다. 2021년 같은 평가에서 3위였던 종로3가가 5년 만에 정상에 오른 것이다. 타임아웃은 이곳을 "골목길 미로와 심야 포장마차, 막걸리가 강처럼 흐르는 곳"으로 묘사했다.
타임아웃이 그린 종로3가는 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동네다. 오랜 단골인 어르신들은 국밥집에 모이고 젊은 여행객은 익선동 한옥 골목의 카페와 소품숍, 사진관을 찾는다. 종묘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서순라길에는 공방과 주얼리 작업실, 길가에 테이블을 내놓은 술집이 늘어섰다. 해가 지면 돈화문로11길에 빨간 플라스틱 의자가 깔리고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라면 냄새가 퍼진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하루 앞둔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세종대왕 동상을 배경으로 셀피를 찍고 있다.올해는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이자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는 해다. / 뉴스1
그레이스 비어드 타임아웃 여행 에디터는 "늦은 저녁 야외에서 즐기는 식사 문화와 독립 상점, 가게들이 늘어난 덕분에 정상에 올랐다"고 말했다. 비어드 에디터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감각이 우리가 이 목록에서 찾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타임아웃은 비싸지 않은 음식값과 탁 트인 거리 분위기, 젠트리피케이션에 휩쓸리지 않은 동네 성격도 종로3가의 장점으로 들었다. 1970년대부터 성소수자 친화 공간이 자리 잡을 만큼 다양한 사람을 품어온 동네라는 점도 소개했다. 이 순위는 세계 각 도시에 있는 타임아웃 필진과 편집자들이 자기 도시의 동네를 추천해 정한다.
'2026 세계에서 가장 친절한 도시' 3위
여행지의 인상을 결정짓는 건 결국 사람이다. 서울은 콘데나스트 트래블러 영국판 독자들이 뽑은 '2026 세계에서 가장 친절한 도시'에서 호주 멜버른과 포르투갈 포르투에 이어 3위에 올랐다. 길가 식당 주인이 낯선 한국 음식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출근길 시민이 지하철에서 헤매는 관광객에게 길을 알려주는 모습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1위 멜버른은 타임아웃 '세계 최고의 도시 50'에서도 1위를 차지한 도시다.
서울 중구 명동 거리가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모습. 2026년 10월 6일자 뉴스1 사진.
서울의 상승세는 다른 평가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타임아웃이 지난 3월 발표한 '세계 최고의 도시 50'에서 서울은 지난해보다 33계단 뛰어오른 9위를 기록했다. 이 순위는 세계 150개 도시 주민 2만4000여명의 설문과 100명 넘는 타임아웃 도시 전문가의 투표를 바탕으로 매겨졌다. 여기서도 서울은 도쿄(10위)를 한 계단 앞섰다. 아시아 도시 가운데서는 중국 상하이가 2위로 가장 높았다. 타임아웃은 서울의 매력으로 "1년 내내 이어지는 문화적 활기"를 꼽았다. 도쿄에 대해서는 "끝없이 창의적인 하위문화와 세계적 수준의 박물관"을 들었다.
산 강서구 대저생태공원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활짝 핀 핑크뮬리를 감상하고 있다. 9월 30일자 뉴스1 사진.
젊은 여행객들의 사랑은 더 오래됐다. 미국 여행 매체 트래지 트래블과 글로벌 트래블러를 발행하는 FX익스프레스 퍼블리케이션스는 지난 8월 '더 트래지스 2026'에서 서울을 '세계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시'로 선정했다. 25~40세 출장·여가 여행객이 투표하는 이 시상에서 서울은 아일랜드 더블린과 홍콩, 영국 런던, 그리스 아테네를 제치고 5년 연속 정상을 지켰다. 이번 수상으로 서울은 이 시상의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인들은 잘 모르지만 서울은 특별한 도시다. 골목 편집숍을 구경하다 동네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 뒤 마음만 먹으면 도심에서 곧장 산에 오를 수 있다. 이런 산들을 품은 대도시가 흔하지 않다. 코리아타임스는 현지인처럼 머무는 '라이프스타일 관광'을 서울에서 누릴 수 있다는 점을 수상 배경으로 꼽았다. 밤늦게 혼자 다녀도 걱정 없는 치안과 촘촘한 대중교통도 '나 홀로 여행족'의 마음을 움직였다. 프랜시스 갤러거 FX익스프레스 퍼블리케이션스 최고경영자(CEO)는 서울을 ‘전 세계 여행객을 단번에 사로잡는 도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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