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파이부터 인물·풍경까지…일상의 평범한 대상 낯설게 보기
초기작부터 마지막 자화상까지 105점 선봬…DDP서 75년 화업 한눈에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하얀 크림을 수북이 올린 케이크, 선명한 색의 아이스크림 콘,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파이.
두텁게 바른 물감은 실제 크림처럼 화면 밖으로 부풀어 오르는, 보기만 해도 달콤함이 입 안에 맴도는 웨인 티보(1920∼2021)의 그림들이다.
하지만 이 달콤함은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정갈하게 진열된 디저트에는 풍요로운 소비사회의 모습과 함께 일상의 고독과 긴장이 스며 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에서 미국 팝아트 거장 웨인 티보의 대규모 회고전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31 웨인 티보 전'이 열리고 있다.
케이크와 파이, 아이스크림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작가의 작업을 초기작부터 100세에 그린 마지막 자화상까지 살펴보는 자리다. 유화와 드로잉 등 약 105점을 통해 75년에 걸친 작업 세계를 조명한다.
1962년작 '샐러드, 샌드위치와 디저트'는 티보의 대표적인 디저트 정물화다.
샐러드와 아보카도, 샌드위치, 푸딩, 레몬 머랭 파이 등을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 배열해 독특한 공간감과 리듬을 만들어낸다.
화면 안쪽으로 갈수록 음식과 접시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과장된 원근감이 생기고, 반복되는 형태는 진열대 자체를 하나의 패턴처럼 보이게 한다.
흰 접시와 파란 진열대, 밝은 색채와 선명한 그림자가 어우러지면서 일상의 음식은 먹는 대상에서 벗어나 빛과 색, 형태를 탐구하는 회화적 대상으로 변한다.
실제보다 더 먹음직스럽게 표현된 음식은 1960년대 미국의 풍요로운 소비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밝고 낙관적인 시대 분위기와 대량생산·진열로 대표되는 현대의 소비 풍경을 보여준다.
그의 시선은 디저트 정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티보의 인물화는 일상의 인물을 화면 속에 배치하면서도 서로 간의 거리와 고립에 주목한다.
1965년작 '앉아 있는 다섯 인물'에서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놓인 의자에 다섯 인물이 앉아 있다. 인물들은 서로 가까이 있지만 누구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으며, 각자의 공간에 고립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어두운 배경 속 빛을 받은 얼굴과 몸은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정작 인물들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아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격식 있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그린 듯하면서도 서로 단절된 모습은 인간 존재의 고독과 소외를 보여준다. 티보는 이를 무겁게만 다루지 않고 특유의 유머와 아이러니를 더해 표현했다.
티보는 산과 강, 도시의 풍경화에서 비탈진 도로와 건물을 비현실적으로 기울이거나 솟아오른 형태로 표현했다. 화면을 따라가다 보면 사물을 바라보는 통상적인 원근법과 균형감이 흔들린다. 이를 통해 익숙한 도시 풍경은 불안정하고 낯설어진다.
'삼각 해변'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듯한 시점으로 해안과 인물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다. 해변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삼각형 형태로 펼쳐지고, 분홍·노랑·보라·파랑 등 강렬한 색채의 띠가 이를 둘러싼다. 해안에 선 사람들은 작은 막대 인형처럼 보이며, 구체적인 풍경은 추상화된 색과 형태로 변한다.
1993년작 '무제(도시 전경)'에서는 창문의 격자와 테이블의 구조가 하나의 기하학적 질서를 이루고, 긴 그림자가 도시를 바라보는 공간을 제단처럼 연출한다.
티보는 이처럼 도시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원근법과 기하학적 형태를 변형해,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와 공간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처럼 디저트의 반복적인 배열, 인물 사이의 거리, 도시와 해변의 기하학적 구도에는 평범한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티보의 시선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티보는 젊은 시절 디즈니 애니메이터와 광고판 제작 등 상업미술 분야에서 일하다 20대 후반에 미술대학에 진학했고, 40대에 접어들어 파이와 케이크를 주요 소재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팝아트 작가로 꼽히지만 정작 본인은 이런 분류에 동의하지 않았다.
티보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나에게 뭔가 이름을 붙여주면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나는 거기 포함된 것 같지 않다. 나는 팝아트를 좋아한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대중문화 이미지를 차용하기보다는 평범한 사물에 숨은 회화적 가능성을 찾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원과 삼각형, 반복되는 선과 배열 등 사물 안의 기하학적 구조를 화면 위에 재구성하고, 닮은 대상들 사이에 색·형태·질감의 미세한 차이를 심어 '질서 속 차이와 변주'를 탐구했다.
100세에 마지막 자화상을 남길 때까지 작업을 이어간 티보는 2021년 101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시는 내년 2월 21일까지.
laecorp@yna.co.kr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