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유정 작가] 문득 지난날의 흑역사가 떠올랐다. 18년도, 한창 복싱을 배우고 있을 때, 삼촌뻘의 관장님이 후배에게 체육관을 인수하면서 젊은 코치들이 들어왔던 그때. 나는 복싱 기술을 제대로 익히진 못했지만, 체력 단련을 하며 동작 하나라도 악착같이 더 오래 버티려 애쓰고 있었다. 아마도 여느 때와 같이 어떤 동작을 오랫동안 유지하던 훈련 중 대충 사 입었던 촌스러운 운동 바지가 드러났고, 몇몇 이들에겐 그게 우스웠나 보다. 그 웃음들을 삼키며 기어코 원하는 만큼 동작을 버텨내었지만, 그때의 나는 분명 창피했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흑역사 중 하나라 기억해왔다.
그런데 오늘, 지난달 지난주와 같이 자전거를 굴리며 퇴근하던 오늘. 문득 그 장면이 더 이상 창피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결코 큰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표면, 남들의 시선과 같은 얄팍한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내 모습이 타인들이 무리를 이루는 한 집단에서 발견되는 경험이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훨씬 더 부끄럽고 부담스럽고 견뎌냈던 시간들이 여러 번 반복되어 왔음을 상기했다. 영원히 부끄러울 것만 같았던 어느 장면이 별것 아니게 된 지금을 자축하며, 작업을 빌어 불확실한 것들을 생산하는 지금의 나를 다시 또 자축하며.
이런 상념을 떠올린 건 레진이라는 작업을 시도하면서부터다. 이를 계획하고 연습해 보며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느 레진 아트처럼 기포 하나 없이 매끄럽고 네모반듯해야 하는가? 그것이 내가 원하는 이번 작업인가? 글쎄, 아닌 것 같다. 깨끗한 물상을 만들기 위해 레진을 사용하기로 한 게 아니다. 그보다 겹겹이 쌓이는 층위가 위아래로 비쳐 보이길 바랐다.
기포는 계속해서 남았다. 레진 안에 넣어 놓는 것이 보이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깨끗하면 되었다. 사방이 매끄러운 실리콘 몰드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호일로 만든 틀에 레진을 분리할 수 있는 비닐을 깔고 부은 탓에 울퉁불퉁한 면이 그대로 남았다. 괜찮다. 중요한 것은 전체의 형태였다. 한눈에 무엇이 보일 것인가가 이번 핵심이었다. 어차피 레진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한 지금은 이번 마감 전에 아무리 디테일을 잡으려 해 봤자 과욕이었다.
전시를 거듭하고 새로운 작업을 선보일수록 학습한 것이라면, 시도를 선보이고 싶다면, 일단 전체적인 형태를 구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테일은 어차피 하나씩 보완될 것이고, 결과물은 맘에 들거나 아예 새롭게 바꿔야 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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