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규원 작가] “어떤 기분인가요?”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날이 있다. 슬프다고 하기에는 분노가 섞여 있고, 괜찮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마음에 남아 있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할 문장이 아직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말 대신 다른 것을 고른다. 종이 위에 선을 긋거나, 찰흙을 누르거나, 아무도 없는 골목을 사진으로 남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에는 말로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머물 자리가 생긴다.
시각예술은 감정을 하나의 이름으로 서둘러 묶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 화면에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이 함께 있을 수 있고, 단단하게 빚은 조각의 한쪽을 다시 무너뜨릴 수도 있다. 모순된 마음을 모순된 상태로 남겨두는 일이 가능하다. “나는 슬프다”라는 문장이 감정을 설명한다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그 슬픔의 모양과 거리를 직접 찾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프리다 칼로의 ‘짧은 머리의 자화상’에는 넉넉한 남성복 차림으로 앉은 인물과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이 등장한다. 익숙한 자신의 모습을 바꾼 이 회화는 얼굴을 닮게 그리는 것만으로 자화상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옷과 자세, 잘린 머리카락까지도 자신을 이야기하는 요소가 된다. 이 작품을 감정을 시각화하는 한 방식으로 읽는다면, 중요한 것은 슬픔에 어울리는 색을 찾는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어떤 장면으로 남길 것인지 선택하는 일이다.
조각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스파이더(셀)’는 거미와 그 아래의 둘러싸인 공간을 결합한다. 이 구조를 바라보면 보호받는다는 느낌과 갇혀 있다는 느낌이 함께 떠오를 수 있다. 감정은 반드시 하나의 표정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어떤 마음은 얼굴보다 공간의 크기와 경계, 사물 사이의 거리로 더 가까이 다가온다.
이러한 작품들이 곧바로 치료의 효과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창작이 마음을 다루는 방식에 관해 생각할 실마리를 준다. 종이 위에 그려진 불안은 잠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손으로 만든 덩어리는 옮기거나 나누거나 다시 붙일 수 있다. 마음속에서는 막연했던 것이 바깥으로 나오면, 그것과 맺는 관계에도 작은 변화가 생길 여지가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여기에 새로운 입구를 만든다.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도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혼자 남은 느낌”을 입력해 이미지를 만들어볼 수 있다. 그 결과를 보며 “이렇게 어둡지는 않다”, “사람보다 빈 의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수정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감정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이미지에 반응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가까운 표현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빠르게 완성된 이미지는 질문도 남긴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것이 보기 좋은 결과물이었다면 AI의 능력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반면 색을 고르고, 선을 망설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다시 그리는 시간이 중요했다면, 그 시간을 모두 줄이는 것이 언제나 도움이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완성도 높은 그림을 얻었는데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AI와 미술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는 생성된 이미지뿐 아니라 사람이 그 이미지에 어떻게 참여했는지도 살펴야 한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웠는지, 어떤 장면을 끝내 선택하지 않았는지가 표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치유가 시작되는 순간은 그림이 아름다워지는 순간과 다를 수 있다. 서툰 선 하나를 바라보며 “지금 내 마음이 조금은 여기 있다”고 느끼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AI가 창작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면, 그 문을 통과한 사람이 자신의 흔적을 남길 자리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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