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디어뉴스] 김혜인 기자 = 1974년 8월 15일 오전,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던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겨냥한 저격이었다. 대통령은 피격되지 않았지만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상을 입었고,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이날 오후 숨졌다. 여고생 장봉화 양도 희생됐다.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은 재일한국인 문세광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으로 남은 ‘8·15 저격 사건’이다.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사건의 기본 골격을 이같이 기록하고 있다.
52년이 지난 2026년, 허진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은 바로 이 사건을 다시 스크린 위로 불러냈다. 개봉 첫 주 누적 관객 150만명을 넘어서며 추석 극장가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흥행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태도다. 영화는 이미 역사책에 적혀 있는 사건을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결론은 정말 전부인가”라고 묻는다.
그 질문이 ‘암살자(들)’의 힘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지점이다.
영화는 형사 철구와 신문사 사회부장 재환, 신입 기자 영일이라는 가상의 인물들을 통해 사건의 이면을 추적한다. 당시 공식 수사 결과에서 설명되지 않는다고 영화가 설정한 총성과 탄환, 현장 관계자들의 엇갈린 진술, 권력기관의 움직임이 미스터리의 재료가 된다. 감독 역시 사건의 결론을 다시 확정하는 것보다 당시 남아 있던 의문과 그 의문을 좇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관객은 역사영화를 볼 때 가장 어려운 문제와 마주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영화인가.
1974년 사건을 둘러싸고 실제로 의문이 제기돼 온 것은 사실이다. 2005년 관련 수사기록 등이 공개되면서 현장에서 몇 발의 총성이 있었는지, 탄착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한일 양국이 사건의 배후를 달리 판단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등장했다. 당시 수사 발표를 토대로 한 보도에는 현장 전체의 총성을 7발로 정리한 기록도 있다. 문세광의 권총에는 5발이 장전돼 있었고 그가 4발을 발사했으며 한 발이 남았다는 것이 당시 수사 결론이었다.
반면 영화는 6발의 총성과 사라진 탄환이라는 설정을 미스터리의 주요 동력으로 삼는다. 실제 사건에서 총성의 횟수와 탄착점을 둘러싼 의문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영화가 그 의문을 특정한 이야기로 재구성했다는 것은 구별돼야 한다. 의혹이 존재했다는 것과 영화가 제시하는 가설이 역사적으로 입증됐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SBS의 영화평 역시 실제 사건의 총성에 대해서는 6발과 7발이라는 기록과 주장이 혼재하지만 영화는 6발로 설정해 이야기를 진행한다고 설명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 왜곡’ 논란이 시작된다.
그러나 역사영화에서 실제 기록과 다른 장면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곧바로 왜곡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영화는 다큐멘터리도, 역사 교과서도 아니다. 실존 사건 사이의 공백을 가상의 인물과 대화로 채워 온 것은 역사영화가 오랫동안 사용해 온 서사 방식이다. 모든 대화와 모든 행동을 문헌으로 입증해야 한다면 수많은 역사영화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문제는 허구의 존재보다 허구의 사용법이다.
특히 실제로 사망한 사람이 존재하고 사건의 책임 소재가 정치·사회적으로 여전히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현대사를 다룰 때 영화가 가진 영향력은 작지 않다. 영화는 두 시간 동안 배우의 얼굴과 음악, 편집과 미장센을 통해 하나의 가능성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영화가 마지막에 “이는 허구”라고 알리더라도 관객의 기억 속에는 활자로 된 단서보다 스크린에서 본 장면이 훨씬 강하게 남을 수 있다.
따라서 역사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은 “실제 기록과 단 하나라도 달랐는가”보다는 “확인된 사실과 추론, 창작된 가설 사이의 거리를 관객이 구별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가”에 가까워야 한다.
‘암살자(들)’은 이 경계에서 상당히 영리하면서도 아슬아슬한 영화를 만든다.
영리한 것은 영화가 역사적 결론을 새로운 결론으로 단순 교체하기보다 ‘의문을 품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철구와 재환, 영일이 하는 일은 거대한 영웅적 투쟁이라기보다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특히 신문사와 기자를 이야기의 한 축으로 선택한 것은 의미가 있다. 1970년대 언론 통제라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기자가 무엇을 알고도 쓰지 못했는가,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는가를 보여주면서 영화는 암살 사건을 ‘누가 총을 쐈는가’의 미스터리에서 ‘누가 진실을 말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로 확장한다.
허진호 감독이 “폭력의 시대에 신념을 지킨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때문에 ‘암살자(들)’은 단순한 정치 미스터리보다 언론과 수사기관, 권력과 개인의 관계를 다룬 시대극으로 볼 때 더 흥미롭다.
그러나 바로 그 뛰어난 연출력 때문에 영화적 가설이 실제 역사보다 강력해질 위험 역시 커진다. 관객이 스크린에서 목격한 장면을 “그럴 수도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숨겨졌던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면 영화적 상상력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된다. 사건을 둘러싼 오래된 의문을 제시하는 것과 특정한 답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처럼 보여주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최근 이 영화를 둘러싸고 정치권 등에서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이 나온 것도 이 부분과 연결돼 있다. 일부에서는 영화가 당시 공식 수사 결과와 다른 배후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실존 인물과 유족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제작진과 감독 측은 사건의 배후를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려는 작품이 아니라 기록에 남은 의문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작품이라는 입장이다.
어느 한쪽의 주장만 받아들이면 ‘암살자(들)’을 제대로 읽기 어렵다.
공식 발표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후의 모든 질문을 금지하는 것도 역사에 대한 태도는 아니다. 실제로 이 사건은 한국과 일본의 조사 결과가 달랐고, 사건 이후 여러 기록과 증언이 공개되면서 논쟁이 이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사건의 세부 진상에는 여전히 논쟁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고 기술한다.
동시에 의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어떤 가설이든 역사적 사실로 만들지는 않는다.
여기에 실화를 다룬 영화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긴장이 있다. 질문할 자유와 단정하지 않을 책임이다.
역사영화의 가치는 과거를 완벽하게 복사하는 데 있지 않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게 하고, 기록에서 밀려난 사람과 질문을 현재로 불러오는 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영화가 만든 가상의 답을 역사적 사실과 혼동하게 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은 오히려 이 영화를 볼 이유가 된다.
1974년 8월 15일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시 찾아보게 만들고, 국가의 공식 기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역사적 의문은 어떤 근거 위에서 제기돼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가 던진 가설에 동의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역사영화를 보면서 어디까지를 역사로 기억하고 있는가.
좋은 역사영화는 관객에게 답을 외워 나가게 하기보다 극장을 나선 뒤 기록을 다시 찾아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암살자(들)’이 남긴 가장 의미 있는 장면은 어쩌면 총성이 울리는 순간이 아니다. 이미 끝났다고 여겼던 사건 앞에 다시 물음표 하나를 세워놓았다는 데 있다.
다만 그 물음표가 언젠가 느낌표로 바뀌려면 영화의 상상력이 아니라 기록과 증거가 필요하다. 실화를 다루는 영화가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이유와, 그 자유만큼 사실 앞에서 신중해야 하는 이유가 동시에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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