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의 마법: "시간을 버티게 만드는 제도"[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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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의 마법: "시간을 버티게 만드는 제도"[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19

이데일리 2026-09-29 06:07:01 신고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유명한 말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세금을 싫어합니다. 월급 명세서에서 세금이 떼일 때마다 내 돈이 빠져나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퇴직금을 받을 때도 “복잡한 건 모르겠고, 일단 세금 내고 털어버리자”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연금에서 세금은 단순히 피하고 싶은 비용만은 아닙니다. 세금은 돈을 얼마나 오래 계좌 안에 머물게 할 것인지, 언제 꺼내게 할 것인지, 일시금으로 받을지 연금으로 받을지를 결정하게 만드는 제도적 신호입니다. 세금이 장기 보유와 연금 수령에 확실한 보상을 주면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반대로 중간에 깨도 큰 차이가 없다고 느끼면, 사람들은 눈앞의 목돈을 선택합니다. 이 시간의 설계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소득세율이 매우 높았던 1950년대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50년대 미국, “90%가 넘는 세금을 피하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동안 미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90%를 넘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세율을 적용받은 것은 아니고, 매우 높은 소득 구간에 적용되는 한계세율이었습니다. 그래도 고소득 임원과 기업 입장에서는 보상을 지금 줄 것인지, 나중에 줄 것인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때 월가의 변호사와 회계사들이 주목한 개념이 ‘지연 보상(Deferred Compensation)’입니다.

“보너스를 지금 받지 마십시오. 지금 받으면 높은 세율을 적용받습니다. 대신 이 돈을 회사가 맡아두었다가, 은퇴하신 뒤에 드리겠습니다. 은퇴 후에는 소득이 줄어 세율이 낮아질 가능성이 큽니다.” 돈을 받는 시점만 뒤로 미뤘을 뿐인데, 세후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고세율의 ‘현재’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세율의 ‘미래’로 소득을 이동시키는 것, 이것이 연금 세제의 핵심인 ‘과세 이연(Tax Deferral)’의 출발점입니다.

제도의 본질 — ‘소득 구간’을 바꾸는 기술

선진국의 연금 세제인 EET 시스템(Exempt-Exempt-Taxed, 가입 시 적립금 비과세/공제 E, 운용 수익 비과세 E, 최종 연금 인출 시 과세 T를 적용하는 글로벌 연금 세제 구조)은 바로 이 ‘시간차 공격’을 제도화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세금 감면이 아니라, 일종의 세금 차익 거래(Tax Arbitrage)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현역 시절에는 소득이 높아 높은 세율을 적용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돈을 지금 임금이나 보너스로 받으면 즉시 세금이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이 돈이 퇴직연금 계좌 안에 들어가면, 국가는 지금 당장 세금을 걷지 않고 나중으로 미룹니다. 미뤄진 세금만큼 더 큰 금액이 계좌 안에서 운용되고, 그 운용수익도 인출 시점까지 과세가 미뤄집니다. 그리고 은퇴 후 소득이 줄어든 시점에 연금으로 나누어 받으면, 세율과 과세 방식이 달라집니다. 결국 연금 투자란 ‘세금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시점을 뒤로 미루고 그 사이 시간을 투자에 쓰게 하는 기술입니다.

한국의 현실 — 복잡함과 헐거운 뒷문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도 과세 이연 제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도의 설계가 복잡하고, 장기 투자를 유도하는 힘이 약합니다.

첫째, 혜택의 체감도가 낮습니다. 미국의 전통적 IRA나 401(k)는 일정 요건 아래 “연금에 넣으면 과세소득 자체가 줄어든다”는 직관적인 혜택을 줍니다. 소득세율이 높은 사람일수록 현재의 절세 효과를 크게 느낍니다. 반면 한국의 개인 납입 세제 혜택은 주로 세액공제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조세 형평성에는 장점이 있지만, “큰돈을 오래 묶어두면 세후 결과가 확실히 달라진다”는 신호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전달됩니다.

둘째, ‘뒷문(일시금 인출)’의 신호가 충분히 강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IRA는 예외 사유가 없는 한 59.5세 이전 인출에 10% 추가세가 붙습니다. 반면 한국의 퇴직급여 이전분은 해지하면 원래 유보되어 있던 이연퇴직소득세를 내고 나오는 구조로 체감되기 쉽습니다. 물론 연금으로 받으면 혜택은 있습니다. 국세청 기준으로 이연퇴직소득을 연금으로 받으면 연금외수령 때 낼 세액의 70%만 내고, 2026년 이후에는 연금 실제 수령연차가 10년을 넘으면 60%, 20년을 넘으면 50%까지 낮아집니다. 하지만 가입자 입장에서는 이 혜택이 “반드시 오래 버텨야 한다”는 강한 잠금장치로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제도가 오래 버티는 사람에게 주는 당근은 있지만, 중간에 내리는 사람을 붙잡는 힘은 약한 셈입니다.

셋째, 더 근본적으로 세제 자체가 ‘개인’이 아니라 ‘재직기간’을 따라갑니다. 퇴직소득세를 정확히 계산하려면 이 돈이 어느 회사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쌓였는지를 계속 추적해야 합니다. 이 설계는 한 직장에서 오래 근속하던 시절에는 자연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평생 여러 번 이직하는 잡노마드 시대에는 재직기간과 이연퇴직소득세의 꼬리표가 계좌마다 따라다니며 무거운 행정 부담이 됩니다. 금융기관이 기존 IRP를 자연스럽게 잇는 대신 매번 새 계좌를 개설하도록 유도하는 원인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제가 ‘어느 회사에서 몇 년 일했는가’보다 ‘이 돈이 연금 계좌 안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고, 결국 연금으로 인출됐는가’를 더 중시해야, 장기 보유와 연금화 인출을 진짜로 유도할 수 있습니다.

세금은 ‘비용’이 아니라 ‘수익’이다

연금 투자에서 수익률 1%를 올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금 제도를 명확하게 설계해 장기 보유를 유도하는 것은 제도의 영역입니다. 한국형 연금 개혁의 세제 파트는 메시지가 더 단순하고 명확해져야 합니다. 복잡한 공제 한도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확실한 신호를 줘야 합니다. “연금 계좌 안에 오래 머물수록 유리합니다. 중간에 깨면 혜택은 줄어듭니다. 회사를 몇 번 옮겼는지가 아니라, 돈이 연금 계좌 안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았는지를 보겠습니다.” 이 신호가 분명해질 때, 사람들은 목돈의 유혹을 조금 더 견디고 연금이라는 장기 열차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 세금 혜택까지 챙겼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금을 아껴도, 내 돈을 굴려주는 과정에서 과도한 비용이 발생한다면 어떨까요? 다음 장에서는 수익률을 갉아먹는 보이지 않는 적, ‘수수료’와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975년 월가의 수수료 자유화 조치가 어떻게 기관과 개인의 운명을 갈라놓았는지, 그 역사를 통해 해법을 모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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