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가공시설만으로 산업화 안 돼…전력·인력·금융 뒷받침돼야"
한국, 기술이전·정책금융 결합한 '장기 산업화 동반자'로 나서야
(서울=연합뉴스) 박세진 기자 = 전 세계적인 녹색 산업 전환 과정에서 핵심 광물이 풍부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원광을 헐값에 수출하던 경제구조에서 벗어나 현지 제련·가공을 통해 제조업과 일자리를 키우는 산업화에 나서고 있다.
전기차·배터리·재생에너지 산업의 급성장으로 리튬·코발트·구리·망간·흑연 등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면서 이들 국가의 자원 협상력이 높아진 것이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광물 주권' 확립과 산업화를 향한 의미 있는 정책 전환으로 평가하면서도 가공시설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전력·물류 등 산업 인프라와 금융 지원, 기술 인력 양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현지 가공시설이 외국계 기업의 고립된 생산기지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중국이나 미국, 유럽연합(EU), 아랍에미리트(UAE)와 자본 규모로 정면 경쟁하기보다 이들이 추진하는 사업에 보완적으로 참여하는 전략이 현실적이라는 진단이다.
한국의 기술력에 개발협력과 정책금융, 인력 양성을 결합해 '장기 산업화 동반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 짐바브웨·DRC 앞장…국가별 추진 여건은 큰 차이
한선이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부연구위원은 "그린·디지털 전환으로 핵심 광물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생산·수출국의 자원을 둘러싼 협상력이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이어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연합(AU)의 '어젠다 2063'에서 잘 드러나듯 자주적인 경제성장을 강조하고 있다"며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현지 제조업 육성과 부가가치 상승을 통해 원자재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를 전환하려는 노력이 광업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자원 고부가가치화 흐름은 아프리카 안에서도 국가마다 추진 속도와 역량에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서상현 고려대 아시아·아프리카개발협력센터 연구위원은 짐바브웨와 콩고민주공화국(DRC), 남아프리카공화국, 잠비아를 광물 주권 확보와 현지 가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국가로 꼽았다.
서 연구위원 분석에 따르면 짐바브웨는 리튬 원광 수출 제한에 이어 정광 수출도 단계적으로 줄이고 리튬염과 수산화리튬 등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가치사슬을 확장하려 하고 있다.
세계 코발트 생산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DRC도 구리·코발트의 현지 제련과 가공을 강화하고 있다. 이미 구리의 상당 부분을 국내에서 정련하고 코발트도 주로 수산화물 형태로 거래돼 일정 수준의 산업 기반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아공은 핵심 광물의 현지 가공과 배터리·수소·전기차 관련 소재산업 육성을 국가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잠비아도 고순도로 정제한 구리인 정련동 중심의 수출구조를 갖춰 비교적 성숙한 구리 가공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말리와 니제르 등은 전력망과 물류 기반, 투자자금이 부족해 금과 우라늄 등을 원광 상태로 수출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잠비크는 천연가스와 흑연, 티타늄 등 자원이 풍부하지만, 외국인 투자 위축을 우려해 정련·가공 의무를 강하게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서 연구위원은 "아프리카의 광물 주권은 모든 국가가 같은 속도로 추진하는 현상이 아니다"라며 "광물의 종류와 전력 가격, 인프라, 기술력, 시장 규모에 따라 선도국과 추격국, 잠재국으로 나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 수출 막는다고 광물 주권 완성되지 않아
전문가들은 원광 수출 제한과 현지 가공 의무화가 반드시 산업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가공시설을 운영할 전력과 용수, 생산품을 운송할 철도와 항만, 설비를 다룰 숙련 인력이 없는 상태에서 규제부터 강화하면 외국인 투자가 위축되고 광산 개발과 생산이 지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부연구위원은 "많은 아프리카 국가에서 산업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기본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며 "인프라와 기술 인력이라는 산업화의 두 핵심 요소가 갖춰져야 현지 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정책적 노력이 실질적인 산업화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 연구위원도 현지 가공의 경제성을 판단할 때는 광석의 품위뿐 아니라 광산 규모와 전력 비용, 물류 접근성, 초기 투자비, 안정적인 원료 공급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지 가공의 경제성이 비교적 높은 분야로 DRC와 잠비아의 구리·코발트, 짐바브웨의 리튬, 남아공의 망간·백금족금속(PGM), 모잠비크의 흑연을 각각 제시했다.
서 연구위원은 현지 가공을 지나치게 서두르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탄자니아는 2017년 원광 수출을 금지했지만, 당시 국내 가공 능력이 충분하지 않아 경제성 있는 가공이 어려웠다. 잠비아도 제련시설의 가동 차질이 발생하자 구리 정광 수출을 한시적으로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집트 출신 경제학자인 모아멘 구다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산업화 전략을 채택했지만, 더 큰 문제는 광물 가공을 국내 및 역내 가치사슬과 연결하는 일관된 장기 산업정책이 부족하고 정책의 실질적인 이행도 미흡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규제 체계와 제도적 역량도 취약한 경우가 많고 안정적인 에너지와 인프라, 숙련 인력, 금융 역시 중요한 제약 요인"이라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현지 가공이 지속 가능한 산업과 기술 고도화, 의미 있는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지 못하고 외국 자본 소유의 고립된 생산기지만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현지 가공의 성패가 추진 여부보다 속도와 방식에 달렸다며, 수출 제한을 앞세우기보다 기반시설과 숙련 인력을 확충하고 세제·금융 혜택과 기술협력을 통해 기업이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을 먼저 조성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개별 국가의 작은 시장과 한정된 자원만으로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기 어렵다면 여러 국가가 공동 가공단지를 구축하고 국경을 넘는 역내 가치사슬을 조성하는 방안도 해법으로 거론됐다.
◇ AfCFTA·로비토 회랑 활용해 대륙 시장으로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들이 아프리카대륙자유무역지대(AfCFTA)를 활용해 개별 국가의 생산 거점을 대륙 전체 시장과 연결하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AfCFTA는 아프리카를 하나의 공동시장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 부연구위원은 "AfCFTA가 성공적으로 이행되면 한국 기업이 한 국가에 진출하는 것이 아프리카 대륙 전체 시장으로 진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자원과 인프라, 인력, 시장 접근성 등이 유리한 국가를 생산 거점으로 삼아 다른 아프리카 국가로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부연구위원은 다만 기본적인 상품·서비스 분야 협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어도 협상 결과와 실제 이행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AfCFTA 활용을 뒷받침할 기반 인프라도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단기적으로는 AfCFTA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강한 국가를 중심으로 진출을 고려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국의 자금력과 아프리카의 인프라 여건을 고려하면 광산과 주변 인프라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보다 미국과 EU, 아프리카개발은행(AfDB) 등이 조성하는 기존 국제 회랑 사업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것이 현실적인 전략으로 제시된다.
대표적인 사업이 앙골라의 대서양 연안 로비토항과 DRC·잠비아의 구리벨트를 연결하는 철도·물류망인 로비토 회랑이다. 미국과 EU는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핵심 광물 공급망을 다변화하기 위해 이 회랑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서 연구위원은 "한국이 모든 인프라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보다는 미국·EU·아프리카개발은행(AfDB) 등이 구축하는 회랑에 참여해 위험을 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광산 지분 확보나 원광 장기 구매에 머물지 말고 선광·제련·가공과 전력·물류 인프라까지 함께 묶는 패키지형 진출이 필요하다며 "한국의 아프리카 광물 전략은 독자 개발과 단순 참여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기존 국제 회랑을 활용하되 핵심 광산과 가공, 장기 구매권을 선점하는 선택과 집중형 공동개발 전략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한국, '제품 판매자' 아닌 산업화 동반자로
아프리카 녹색산업을 둘러싼 경쟁에서 중국은 가격 경쟁력과 대규모 제조 설비, UAE는 풍부한 자본과 에너지 개발 역량을 앞세우고 있다.
한 부연구위원은 "아프리카 경험과 현지 이해도가 높은 국가들과 차별화 경쟁을 벌이기보다 이들과 보완적으로 협력하는 편이 현실적"이라며 "각국이 강점을 가진 분야에서 협력하는 과정에 참여해 아프리카 내 한국의 입지를 조금씩 넓혀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로 배터리와 자동차를 비롯해 에너지 저장·운송, 전력망 효율화, 원전, 친환경 이동수단, 스마트 제조, 조선·해양 산업 등을 꼽았다.
한국이 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한 과거가 없고 강대국 간 지정학적 경쟁의 당사자로 인식되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도 강점으로 거론된다.
구다 교수는 "한국은 아프리카에서 식민 지배나 강대국 경쟁의 관점으로 인식되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며 "개발도상국에서 선진 산업국가로 전환한 경험도 한국에 독특한 위치를 부여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이 기술이전과 인력 양성, 현지 제조를 강조하면서 단순한 원자재 구매자가 아니라 장기적인 산업화 동반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 발전량 넘어 산업·일자리로…아프리카 기술자의 주문
에티오피아에서 통신과 농촌 연결망 등 인프라 사업에 참여한 뒤 명지대에서 환경에너지공학을 공부하고 있는 아베네제르 요하네스 씨는 "인프라가 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닿을 때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며 재생에너지 역시 같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프리카에 천연자원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그 자원을 주민을 위한 생산적인 기회로 바꾸는 역량"이라며 "전력을 생산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이를 현지 제조업과 농업, 중소기업, 디지털 서비스 등 고용을 창출하는 산업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아프리카 녹색 전환의 진정한 척도는 몇 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했느냐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산업 기반을 구축하고, 얼마나 많은 청년을 양성하며, 얼마나 많은 부가가치를 아프리카에 남겼느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기술협력도 장비 공급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현지 기술자들이 외국에서 들여온 기술과 설비를 설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운용·유지·보수하며, 현지 여건에 맞게 개량해 장기적으로는 제조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베네제르 씨는 인프라 구축과 품질관리 업무 경험을 토대로 기술과 설비의 품질과 신뢰성, 에너지 효율, 유지·보수와 사후 기술지원까지 함께 따져야 한다며 "초기 도입 비용이 가장 낮은 기술·설비가 사업 기간 전체를 놓고 봐도 가장 경제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상적인 한·아프리카 협력은 아프리카가 한국 기술을 구매하는 데 그치는 관계가 아니라 아프리카 기술자들이 이를 사용하고 유지하며 현지 조건에 맞게 개량해 궁극적으로 기술 개발과 제조에도 참여하는 관계"라고 강조했다.
◇ 탄자니아 흑연·잠비아 구리…정책금융으로 위험 분담
한국 기업의 유망한 진출 대상으로는 탄자니아의 흑연과 잠비아의 구리가 거론됐다.
서 연구위원은 탄자니아에서는 '흑연 광산·현지 가공·배터리 소재', 잠비아에서는 '구리 광산·전력 인프라·스마트 마이닝'을 결합한 패키지형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광산 개발에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을 적용하고 기반시설과 현지 전문인력 양성, 장기 구매계약을 하나로 묶는 방식이다.
이를 현실화하려면 정부와 정책금융기관이 기업의 초기 위험을 분담해야 한다. 정부는 정상외교와 정부 간 협의를 통해 투자 보호와 광산권, 세제 등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으로 기반시설을 지원할 수 있다.
수출입은행과 한국무역보험공사 등은 사업 단계별 금융과 보증을 제공해 기업의 위험을 낮추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한 부연구위원은 공적개발원조(ODA)를 활용해 한국 기업이 아프리카 경험을 쌓고 현지에 한국 기업을 알릴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무역보험과 투자보증도 강화하되 정부의 다른 재원을 활용해 손실 일부를 부담하는 방식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업 준비 단계에서 ODA를 활용해 금융 조달 가능성을 높인 뒤 EDCF와 경제협력증진자금(EDPF), 다자개발은행, 무역보험 등 다양한 재원을 연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 연구위원은 "한국의 전략은 광산을 확보하는 것에서 광산·인프라·기술·인력을 함께 구축하고 장기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광을 사 가는 또 하나의 외부 세력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기술과 인력, 산업 기반을 남기는 동반자로 인정받아야 한국도 궁극적으로 아프리카 녹색 공급망의 안정적인 한 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parksj@yna.co.kr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