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검은 소스가 면발을 뒤덮는다. 잘게 썬 양파와 돼지고기가 배합되고 그 곁엔 단무지가 놓인다. 전화 주문이 보편화됐던 과거, 금속 배달통에 담긴 짜장면은 집과 사무실, 공사장을 가리지 않고 파고들었다. 오랜 기간 값싼 외식과 배달 문화의 상징으로 소비됐다.
중국에도 산둥·베이징 계열 면 요리인 ‘자장몐(炸醬麵)’이 존재한다. 명칭의 어원은 같으나 맛과 형태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중국식 자장몐은 텐멘장(첨면장) 등에 돼지고기를 볶아 되직한 양념을 소량 얹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반면 한국 짜장면은 춘장에 양파와 돼지고기, 육수를 넣고 볶은 뒤 전분을 풀어 농도를 맞춘다. 소스의 양이 넉넉하고, 색은 더 짙으며 당도가 높다. 중국 산둥 계통에서 출발했으나, 국내 환경에 맞춰 뼈대부터 다시 세워진 독자적인 ‘한국식 중화 음식’으로 안착한 것이다.
짜장면 한 그릇에는 개항 이후 화교의 정착사, 식품 제조업의 발달, 밀가루 소비 정책, 통신망 보급과 배달 노동의 변천이 압축됐다. 여러 시대적 조건이 겹겹이 쌓여 완성된 근현대의 산물에 가깝다.
◇인천 개항과 산둥 장국수의 유입
출발점은 1883년 개항한 인천이다. 청나라 조계지가 형성되면서 중국 상인과 노동자, 관리가 인천항 주변에 터를 잡았다. 1884년 이후 산둥 출신 화교의 집단 거주가 늘었고, 숙박업과 요식업도 팽창했다. 항만에서 종사하던 산둥 출신 노동자들은 고향의 장국수 계열 음식을 간편한 끼니로 삼았다. 인천 개항장과 화교 사회가 한국 짜장면 역사의 진원지로 꼽히는 이유다.
초창기 형태는 현재의 검고 단 짜장면과 거리가 멀었다. 밀과 콩을 발효한 장을 볶아 면에 비비는 형태였으며, 소스 역시 현재보다 밝은 누런 갈색에 가까웠다. 항만 노동자의 끼니와 고급 청요릿집의 요리는 성격이 달랐다. 중국인 거주가 늘면서 값싼 면 요리와 고급 요리가 한 도시 내에서 각기 소비됐다. 짜장면의 기원을 노동자 음식 하나로만 좁혀서 단정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공화춘 1905년 개업설과 맛의 표준화
인천 차이나타운의 ‘공화춘’은 짜장면 역사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상호다. 현재 짜장면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인천 선린동 옛 공화춘 건물은 1905년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6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개업 시점과 영업 형태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시차가 존재한다. 1907년 우희광이 인천에 ‘산동회관’을 열고 1912년경 상호를 공화춘으로 변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7년 화교 다수가 현재의 건물을 공동 매입한 내역과 1934년 인천 화교 상인 명부에 공화춘이 기재된 사실도 확인된다. 문헌만으로는 공화춘이 현재 위치에서 언제부터 중화요리점을 본격 운영했는지 정확히 특정하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1905년 개업설을 정설로 받아들이지만, 1912년 개업설도 꾸준히 제기된다. 공화춘이 짜장면 대중화에 기여한 핵심 식당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최초 발명지’로 확정하는 문제는 엄격히 분리해 접근해야 한다.
한국 짜장면의 정체성을 뒤바꾼 결정적 재료는 ‘춘장’이다. 초기 화교 음식점들은 텐멘장을 직접 담가 썼기에 식당마다 맛의 편차가 컸다. 이후 공장에서 춘장이 대량 생산되면서 소스 맛의 표준화가 급진전됐다. 1948년 화교 왕송산이 서울 용산구에 ‘영화장유’를 설립해 사자표 춘장 생산을 시작했다. 텐멘장에 캐러멜을 혼합한 춘장의 개발 시점을 두고는 1948년과 1950년대 중반이라는 두 가지 엇갈린 기록이 존재한다. 분명한 사실은 공장제 춘장과 캐러멜의 도입이 짜장면의 색상과 당도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양파와 돼지고기를 볶고 전분으로 농도를 맞추는 조리법이 정착하면서 소스의 양도 풍성해졌다. 대량 생산된 춘장은 지역 간 맛의 격차를 지웠다. 어느 동네 중식당을 가도 익숙한 짠맛과 단맛을 경험하게 된 산업적 배경이 됐다.
◇동네 중국집의 팽창…철가방 배달 노동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밀가루 공급의 팽창은 짜장면 대중화의 강력한 촉매제였다. 정부는 1962년 11월 혼분식 장려 운동을 본격화했다. 미국산 원조 밀이 쏟아지던 시기에 쌀 소비 억제를 위해 분식을 적극 권장했다. 정책의 여파로 1965년 13.8㎏이던 국민 1인당 연간 밀 소비량은 1969년 28.7㎏으로 4년 만에 두 배 이상 급증했다. 1969년에는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로 지정해 일과 시간 중 요식업소의 쌀 음식 판매를 통제하기도 했다.
국가 주도의 밀가루 소비 정책은 짜장면이 값싼 외식 메뉴로 안착하는 토대가 됐다. 도시 인구 팽창, 화교 중식당의 증가, 신속한 조리 시간 등 외식 산업적 요인이 결합했다. 졸업식이나 이사 등 특별한 날 중국집을 찾는 생활 문화도 이 시기 확고히 뿌리내렸다.
배달 시스템은 짜장면의 한국적 특성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요소다. 1931년 기사에 ‘음식 배달부’가 직업군으로 등장할 만큼 배달 문화의 역사는 깊다. 초기에는 나무로 짠 원통이나 직육면체 배달통이 주로 쓰였다. 1960년대 가정용 전화기가 보급되면서 주문 편의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1970년대에는 도로 포장률이 높아지고, 가볍고 세척이 쉬운 금속 배달 가방이 확산했다. 1980년대 오토바이의 도입은 배달 반경을 획기적으로 넓혔다.
‘철가방’이라는 단어는 1980년대 후반 방송 매체를 통해 대중화됐으나, 도구 자체는 1970년대부터 외식 현장에 존재했다. 철가방은 운반이 수월했던 짜장면을 식당 내부에서 가정과 사무실로 확장시킨 핵심 생활 도구였다. 현재는 철가방을 들고 배달과 그릇 수거를 전담하던 방식은 배달 애플리케이션과 일회용 용기에 자리를 내줬다. 배달이라는 행위 자체는 남았지만, 노동의 주체와 운반 도구는 플랫폼 경제에 맞춰 재편됐다.
◇‘짜장면’ 표기와 외식 물가의 지표
표기법의 변화에도 생활사가 투영됐다. 오랜 기간 ‘자장면’만이 단일한 표준 규범으로 묶여 있었으나, 대중의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된소리 발음인 ‘짜장면’이 압도적으로 통용됐다. 결국 언어 현실을 수용해 2011년 ‘짜장면’이 복수 표준어로 인정받았다. 중국어 ‘자장몐’에서 유래한 명칭이 한국인의 구강 구조와 언어 습관에 맞춰 토착화된 과정은 음식 자체가 한국식으로 변형된 궤적과 정확히 닿아 있다.
과거 기록에 따르면 서울 시내 짜장면 가격은 1960년 15원에서 출발해 1971년 60원, 1980년 350원, 1991년 1400원 선으로 상승했다. 과거 정부가 서민 생활 안정을 명목으로 짜장면 값을 중점 관리 대상으로 묶어두면서 타 외식 메뉴 대비 인상 폭이 억제됐던 측면도 존재한다. 세월이 흘러 원재료비와 인건비, 임차료가 누적 상승하며 가격 저항선도 무너졌다. 올해 1월 기준 서울 지역 자장면 1인분 평균 가격은 7654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2.1% 인상됐다. 2025년 서울 연평균 짜장면 가격은 7551원으로 2024년(7253원)보다 4.1% 올랐다.
가장 저렴한 한 끼의 상징이던 메뉴가 이제는 외식 물가의 부담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경제 지표가 됐다. 1970년 최초 출시된 인스턴트 짜장면을 기점으로 짜장라면 등 가공식품 시장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소비 지평을 꾸준히 넓혔다.
◇철판 위에서 조립된 한국 근현대사
짜장면의 태동을 특정 연도나 특정 식당의 공로로 귀결시킬 수는 없다. 개항장 인천에 터를 잡은 산둥 화교, 항만 노동자의 장국수, 공장제 춘장의 발명, 전후 밀가루 공급 확대, 통신망과 금속 철가방 등 다방면의 시대적 조건이 결합한 결과물이다. 현재의 짜장면은 중국 산둥의 자장몐과 명백한 간극을 둔다. 누런 장은 검고 달콤해졌고, 전분물이 만들어낸 풍성한 소스는 철가방에 실려 식당 문을 넘나 들었다. 타국의 국수 요리를 철저히 한국의 경제·사회적 환경에 맞춰 재조립해 낸 것이다.
인천 선린동 옛 공화춘 건물에는 빛바랜 상호와 낡은 철가방이 남아 있다. 짜장면 한 그릇의 궤적을 좇아가면 개항장의 부두와 전후 식량 정책, 산업화 시대의 배달 노동이 읽힌다. 짜장면은 한국 근현대사가 음식에 남긴 가장 선명하고 극적인 지문이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