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에 새롭게 문을 여는 아트갤러리76(관장 조정일)이 개관전 《한국 현대미술, 풍경이 된 시선들》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을 한자리에 펼쳐 보인다. 10월 1일부터 오는 11월 15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권여현, 김경희, 김형대, 서승원, 유병훈, 이강소, 이계원, 이석주, 제정자, 주태석, 지석철, 한만영, 황찬수 등 13인이 참여한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작가들을 하나의 사조나 세대, 양식으로 묶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조형 언어를 구축해온 작가들의 작품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이 얼마나 다양한 시선의 축적 위에서 형성됐는지를 보여준다.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풍경’ 역시 단순한 자연의 풍경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바라본 세계인 동시에, 서로 다른 작가들이 오랜 시간 만들어온 한국 현대미술 자체의 풍경이다.
지석철의 화면에서 의자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남아 있는 의자는 부재와 상실을 환기하며, 텅 빈 공간은 오히려 강한 존재감을 갖는다. 반면 제정자가 오랫동안 다뤄온 버선은 전통 생활문화의 한 형태를 넘어 반복과 병치를 통해 독자적인 조형 언어로 확장된다. 하나의 사물이 작가의 시선에 따라 심리의 기호가 되기도 하고 전통과 현재를 잇는 회화적 장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전통을 바라보는 방식은 이강소의 작업에서도 확인된다. 그의 화면에서는 붓질과 여백, 행위와 공간의 관계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무엇인가를 빈틈없이 재현하기보다 붓이 지나간 흔적과 비어 있는 공간 사이에서 화면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전통의 현대적 계승은 특정한 소재를 반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을 대하는 태도와 조형적 사고 속에서도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추상으로 향한 작가들의 시선도 각기 다르다. 김형대는 빛에 대한 동경과 내면의 영성을 화면에 응축하고, 서승원은 절제된 화면과 여백을 통해 형상과 공간의 질서를 탐구한다. 황찬수에게 색은 기억과 감정의 움직임을 전달하는 핵심적인 언어다. 모두 추상이라는 범주에 놓일 수 있지만, 그들이 화면에 담아낸 정신적 경험과 색채의 구조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
한만영과 이석주, 권여현은 익숙한 이미지에 낯선 질서를 부여한다. 한만영은 동서양의 이미지와 과거와 현재의 사물을 한 화면에 병치하며 시간의 경계를 흔든다. 이석주는 치밀한 묘사와 비현실적인 공간을 통해 시간과 영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권여현은 신화와 실존적 상징을 호출해 현실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을 구축한다.
자연 역시 이 전시에서 중요한 축이다. 유병훈은 숲과 계절의 기운을 절제된 색채로 담아내고, 김경희는 빛의 파편을 통해 생명의 감각을 환기한다. 주태석은 실제 풍경과는 다른 가상의 자연을 구축하며 시각적 경험에 촉각적인 감각을 더한다. 이들에게 자연은 ‘닮게 그리는 대상’이라기보다 작가가 무엇을 감지하고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하나의 언어다.
이계원의 겹쳐진 색면은 관계의 문제를 형식적으로 보여준다. 미세한 각도 차이를 가진 면들이 서로를 완전히 지우지 않으면서 하나의 화면을 만들어낸다. 전시 서문을 쓴 서성록 안동대 명예교수는 이러한 겹침에서 서로 다른 개체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읽어낸다.
서 교수는 참여 작가들의 작업을 내면, 상상력, 삶의 질감, 자연, 전통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다섯 갈래로 접근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의 의미는 이 구분 자체보다 그 경계를 넘나드는 데 있다. 내면은 자연과 만나고, 전통은 오늘의 삶과 겹치며, 추상은 구체적인 기억과 연결된다.
서 교수는 평론에서 “문화는 거저 성취되지 않으며, 자신의 시선을 온전히 벼려낸 예술가들의 고투와 헌신을 거름 삼아 꽃을 피운다”고 짚었다. 결국 이번 전시는 13명의 작가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시대를 통과하며 각자가 자신의 시선을 어떻게 벼려왔는지를 보여주는 자리다.
청담동에 새롭게 출발하는 아트갤러리76이 첫 전시의 주제를 ‘한국 현대미술’로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동시대 미술이 새로운 담론과 매체를 끊임없이 확장하는 시대에, 한국 현대미술을 만들어온 작가들의 시선을 다시 한 화면에 불러오는 일은 현재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한편 전시는 10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서울 청담동 아트갤러리76에서 열린다. 개관식은 10월 1일 오후 4시.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관람료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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