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우디, 미국의 틈새가 아닌 새로운 전략공간을 만든다
중동의 외교·안보 지형이 달라지고 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가 약화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2026년 이란전쟁 과정에서 사우디가 미국의 전략적 판단에 충분히 사전 협의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리야드에서는 미국 안보 공약의 예측 가능성을 둘러싼 논의가 커졌다.
그렇다고 사우디가 미국을 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국가와 경제·안보 협력을 확대하는 다변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숫자가 이를 보여준다.
2024년 말 기준 사우디의 한국에 대한 FDI 재고는 90억 달러로, 2023년 77억 달러에서 약 16.9% 증가했다. 2026년 7월 한 달 동안 사우디의 대한국 수출은 65억 달러,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은 11억 달러였다.
산업협력도 단순한 수출입을 넘어섰다.
현대자동차와 사우디 국부펀드(PIF)가 추진하는 현지 완성차 공장은 연간 약 5만 대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기차와 내연기관차를 함께 생산하는 제조 거점이다.
조선 분야에서는 HD한국조선해양과 아람코가 참여하는 IMI(International Maritime Industries)가 496만㎡, 축구장 약 700개 규모로 조성되고 있으며, 향후 초대형 원유운반선 등을 연간 약 40척 생산할 계획이다.
방산 협력은 더 중요한 변화다.
지난 2월 한·사우디 국방 당국은 국방 연구개발 협력 MOU를 체결했다. 단순 무기 구매에서 벗어나 양국 국방 연구기관이 공동으로 기술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미국이 사우디에 제공하는 안보 우산을 한국이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과 다른 방식으로 사우디와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방산 + 자동차 + 조선 + 에너지 + AI + 제조업을 하나의 산업협력 생태계로 묶는 것이다.
특히 현대차의 연 5만 대 생산공장, IMI의 연 40여 척 생산능력, 양국 국방 연구개발 협력, 그리고 90억 달러 규모의 한국 관련 FDI는 한·사우디 관계가 단순한 경제교류를 넘어서는 흐름임을 보여준다.
결국 한국이 노려야 할 것은 ‘미국의 빈자리’ 자체가 아니다.
사우디가 미국·중국·러시아·유럽 등과 관계를 다변화하는 과정에서 한국만이 제공할 수 있는 제조업과 기술, 방산과 에너지의 결합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사우디가 원하는 것은 무기만 파는 나라가 아니다.
자국에서 자동차를 만들고, 선박을 건조하고, 에너지를 산업으로 전환하고, AI와 첨단기술을 접목할 수 있는 산업 파트너다.
한국에는 이미 그 기반이 있다.
이제 한·사우디 관계를 ‘중동 수출시장’이라는 좁은 프레임에서 벗어나 공동생산·공동기술개발·공동투자·공동방산개발이 가능한 실질적 전략동반자 관계로 발전시켜야 할 때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경쟁의 핵심은 미국을 누가 대체하느냐가 아니다.
사우디의 미래 산업을 누가 함께 만들어 가느냐에 있다.
한국에게 그 기회가 열리고 있다.
강창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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