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탁에서 우유나 두유, 주스를 다 마신 뒤 빈 용기를 다루는 일상적 풍경을 되짚어보자. 대다수 가정에서는 택배 상자나 신문지, 전단지 등 일반 폐지가 담긴 마대 자루에 종이팩을 무심코 던져 넣곤 했다. 어차피 같은 '종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오랜 습관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무심함이 매년 수만 톤에 달하는 최고급 수입 자원을 소각장으로 몰아넣는 비극의 시작점이었다.
아파트 단지 내 분리수거장. / 뉴스1
오는 10월부터 전국 주요 아파트 단지 분리수거장의 풍경이 전면적으로 개편된다. 그동안 택배 상자 더미 속에 섞여 들어가 그대로 폐기되던 우유팩과 멸균팩을 별도로 수거하는 전용 배출함이 전국 공동주택에 설치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10월 자율 시행을 통해 현장 안착 여부를 점검한 뒤, 내년 1월 1일부터 전국 의무관리 대상 공동주택에서 종이팩 분리배출을 전면 의무화한다. 대상은 300세대 이상 공동주택이거나 150세대 이상이면서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거나 중앙집중식 난방을 하는 아파트 등으로, 전국적으로 약 14만 4000개 동에 달한다.
해당 조치는 단순한 쓰레기 분리수거 지침의 변경에 그치지 않는다. 수년째 10%대 늪에 갇혀 있던 국가 종이팩 재활용률을 끌어올리고, 생산부터 수거, 선별, 재생산에 이르는 산업 생태계 전체를 수술하는 거대한 자원순환 대변혁의 시작이다.
00% 고급 천연펄프의 역설...금속캔 82% 재활용될 때 종이팩은 13% 불과
우유나 음료 포장재로 쓰이는 종이팩은 사실 폐기물 시장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몸이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침엽수 기반의 100% 고급 천연펄프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원료는 물에 풀어 재가공하기만 하면 미용 티슈, 고급 화장지, 페이퍼 타월 등 고부가가치 종이 제품으로 즉시 재생될 수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종이팩 1톤을 재활용할 경우 30년생 나무 20그루를 심는 것과 맞먹는 탄소 흡수 및 감축 효과가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종이팩은 가장 철저히 외면받는 폐기물이었다. 환경지표 분석에 따르면 국내 자원 재활용률에서 금속캔은 82%, 페트병은 79%, 유리병은 64% 수준의 높은 수거·재활용 성과를 내고 있다. 반면 종이팩의 회수·재활용률은 2019년 19.9%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해 2023년 13%까지 추락했다. 2024년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 조사에서도 재활용률은 13.9%에 그쳤다. 국내에서 해마다 출고되는 약 7만 5000톤의 종이팩 가운데 10개 중 9개가 자원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버려지고 있는 셈이다.
우유팩 분리수거 하는 모습. / 뉴스1
이처럼 기형적으로 낮은 재활용률의 원인은 종이팩이 가진 물리적 특성과 기존 폐지 수거 체계의 충돌에 있다. 일반 종이 상자는 물에 쉽게 풀어지는 성질을 지녔지만, 종이팩은 액체가 새거나 젖지 않도록 안팎에 폴리에틸렌(PE) 필름이 코팅되어 있고 습윤제강제가 첨가되어 있다.
이 때문에 종이팩이 일반 박스나 신문지와 섞인 채 제지 공장의 해일기에 들어가면, 정해진 시간 내에 종이팩의 펄프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결국 풀리지 않은 종이팩 덩어리는 제지 공정의 스크린 걸러짐 단계에서 이물질로 취급되어 통째로 걸러진 뒤 잔재물로 소각되거나 매립된다. 자원순환유통지원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연간 출고되는 종이팩 물량 중 약 60%는 일반 폐지에 섞여 들어가 잔재물로 소각되고, 약 27%는 분리수거조차 되지 못한 채 종량제 봉투에 담겨 버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물상도 외면한 우유팩, 멸균팩 확산과 민간 수거 생태계의 비명
종이팩이 배출 단계에서부터 외면받아 온 배경에는 국내 폐지 수거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와 최근 급증한 '멸균팩' 유통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내 골목길 수거의 최전선을 담당해 온 것은 폐지 수집 노인들과 민간 고물상이다.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에서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은 약 1만 4800여 명으로, 이들의 월평균 소득은 76만 6000원에 불과하다.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폐지를 줍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위 무게당 거래 가격'과 '수거 효율성'이다. 무겁고 끈으로 묶기 쉬운 두꺼운 골판지 상자가 선호되는 반면, 부피에 비해 무게가 나가지 않고 내용물이 남아 있어 악취나 부패를 유발하는 종이팩은 수거 대상에서 우선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다. 고물상 입장에서도 일반 폐지에 종이팩이 많이 섞여 있으면 제지회사에 판매할 때 감가상각이나 반품 사유가 되므로 종이팩 수거를 꺼려왔다.
바닥에 버려진 우유팩들. / 뉴스1
여기에 더해 멸균팩의 급속한 보급은 현장의 혼란을 한층 가중시켰다. 멸균팩은 기존 우유팩(살균팩)과 달리 종이층 사이에 알루미늄 박막이 추가로 합지되어 있어 상온에서 장기간 음료를 보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두유, 아몬드 음료, 단백질 음료 등 프리미엄 음료의 성장에 힘입어 멸균팩 사용량은 급증했다.
문제는 멸균팩과 일반 우유팩의 재활용 공정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일반 우유팩은 PE 필름만 분리하면 고급 화장지로 만들 수 있지만, 멸균팩은 알루미늄층을 분리하는 별도의 용해 및 선별 설비가 필요하다. 멸균팩의 알루미늄 성분이 일반 종이팩 재활용 공정에 들어가면 재생 화장지의 백색도를 떨어뜨리고 지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이 된다.
게다가 2021년 이후 환경부가 멸균팩에 '재활용 어려움' 표시를 적용하면서, 수많은 시민이 멸균팩을 '재활용이 전혀 불가능한 일반 쓰레기'로 오인해 종량제 봉투에 버리는 부작용까지 발생했다. 제대로 된 전용 수거함과 구별 배출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 기술적·제도적 혼선이 가중되자 종이팩 재활용률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민관이 구축하는 '닫힌 고리' 순환 체계... 유가공·제지·제조사 총출동
벼랑 끝에 몰린 종이팩 자원순환을 복원하기 위해 정부와 산업계가 마침내 한자리에 모였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월요일인 21일 오전 대전 대덕구 한솔제지 대전공장에서 종이팩 재활용체계 개선을 위한 민관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21일 오전 한솔제지 대전공장에서 열린 '종이팩 재활용체계 개선 업무협약식'에서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왼쪽 다섯 번째)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기후에너지환경부 제공-뉴스1
이번 협약은 기존의 단순한 캠페인 수준을 넘어, 제품의 생산과 제조, 소비, 수거, 재생산에 이르는 산업 밸류체인의 모든 주체가 동참해 선순환 체계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정부는 버려지던 종이팩이 다시 고품질 재생 원료와 제품으로 돌아오는 이른바 '닫힌 고리' 형태의 순환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명확히 했다.
협약에 참여한 주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구조적 역할을 나누어 수행한다. 서울우유협동조합과 매일유업 등 주요 유가공업체는 재활용의무생산자로서 종이팩의 회수와 선별, 재활용에 필요한 재정적 비용 분담금을 대폭 확대하고, 자사 제품이나 사업장에서 종이팩을 원료로 만든 재활용 휴지 및 포장재 등의 구매를 적극 늘리기로 했다.
테트라팩코리아와 에스아이지콤비블록코리아 등 글로벌 종이팩 제조사들은 제품 설계 단계부터 재활용이 용이한 구조와 재질을 개발해 보급하는 한편, 민간 재활용 선별장에 광학 선별기 등 첨단 자동화 설비가 도입될 수 있도록 기술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약속했다.
수거된 종이팩을 실제 제품으로 재생산하는 재활용업계의 역할도 결정적이다. 한솔제지와 쌍용씨앤비는 공동주택 등에서 별도로 모인 종이팩을 전량 선별·매입하여 고품질 재생 펄프 추출 기술을 가동하고, 이를 친환경 화장지, 페이퍼 타월, 고강도 지함 등 다양한 재활용 상품으로 연속 생산하는 공정을 대폭 강화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포장재재활용사업공제조합과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는 출고량 대비 재활용 실적을 투명하게 정밀 관리하고, 수거·선별업체와 재활용업체에 지급되는 재활용지원금을 적기에 차등 지급하여 민간 수거 시장의 수익성을 보장하는 안전판 역할을 맡는다.
"비우고, 헹구고, 펼치고"...성공적 안착을 위한 3가지 과제
정책 성공적 안착을 위한 3가지 과제.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정부의 규제 신설과 산업계의 투자 발표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실제 현장에서 성공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10월 자율 시행을 앞둔 전국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와 입주민들 사이에서는 구체적인 현장 실행 방안을 두고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제도 안착을 위해 다음의 세 가지 핵심 과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첫째는 시민들의 올바른 배출 문화 정착이다. 아무리 세분화된 수거함이 설치되어도 오염된 종이팩이 유입되면 수거물 전체가 폐기물로 전락한다. 배출의 기본 원칙은 간단하다. 용기 안의 우유나 음료 잔여물을 완전히 비우고, 물로 가볍게 헹군 뒤, 가위나 손으로 가짓재를 잘라 평평하게 펼쳐서 말린 후 배출하는 것이다. 빨대나 플라스틱 뚜껑 등 타 재질은 반드시 따로 제거해야 한다. 특히 수거함 내에서도 지붕 모양의 일반 우유팩(살균팩)과 알루미늄이 첨가된 멸균팩을 구분하여 투입하는 세심한 배출 참여가 요구된다.
둘째는 지자체의 물류·수거 지원체계 보완이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입주민들이 종이팩을 아무리 잘 정리해 놓아도, 이를 수거해 가는 수거업체가 운반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일반 종이와 섞어서 적재해 버리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따라서 지자체는 종이팩 전용 수거 차량 동선을 확보하거나, 민간 수거업체에 종이팩 수거량에 따른 인센티브 및 압축 설비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아울러 동주민센터 등에서 시행 중인 '종이팩-휴지·종량제봉투 교환 사업'을 아파트 단지 단위 수거 거점과 연계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셋째는 멸균팩 재활용 기술의 다변화와 수요처 창출이다. 멸균팩에서 분리된 알루미늄과 PE 합성 소재를 건축 자재, 물류용 팔레트, 플라스틱 복합재 등으로 재활용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확충되어야 한다. 재생 원료로 만든 제품의 공공기관 의무 구매 비율을 높여 재활용 제품의 시장 판로를 확실히 보장해 주는 정책적 뒷받침도 필수적이다.
시민단체, 종이팩 분리배출 촉구.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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