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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해일의 필모그래피에는 함께한 감독과 만들어가는 기나긴 과정과 시간이 응축돼 있다. 그래서인지, 필연적으로 그는 어떤 면에서 감독의 이상향을 가득 담은 캐릭터를 그려냈다. 영화 '헤어질 결심' 해준, '한산' 이순신 등이 그랬다. 그리고 그 흐름이 '암살자(들)'로 이어진다. '암살자(들)'속 재환은 시대의 '좋은 어른'이었고, 허진호 감독의 이상향이었다.
영화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영부인 저격 사건이 일어나기 9일 전부터 시작해, 의혹과 배후를 추적하는 작품이다. 박해일은 동성일보 사회부 부장 김재환 역을 맡아 형사 박철구(유해진), 신입 기자 한영일(이민호)과 함께 공식 발표 뒤에 남은 의문을 좇는다. 오랜 취재 경험으로 단서의 연결고리를 찾고 후배를 움직이는 재환은, 사건을 추적하는 동시에 신문사 동료들을 이끄는 인물이다.
앞서 이민호는 박해일이 등장하지 않는 자신의 첫 촬영 날, 그가 현장에 왔다고 이야기했다. 영일이 재환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거는 장면이었다. 그때 박해일은 한쪽 구석에서 이민호의 대사를 받아줬다. 그는 "현장을 미리 가보는 편이다. 그게 내게 유리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담담하게 답했다. 관객에게는 흘러가는 1초의 화면 속에는 화면 밖에 있는 박해일까지 담겨있다. 그 장면이 박해일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설지 짐작하게 하는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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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어떻게 준비해 나갔는지 궁금하다.
"제가 아장아장 걸을 때, 벌어진 이야기다. 사건은 알고 있었지만, 이 작품의 제안을 받고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허진호 감독님께 많이 물었다. 감독님께서도 70년대 작품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덕혜옹주' 때 감독님을 처음 뵈었는데, 그때도 구한말 시기 아닌가. 시대의 공기를 느껴볼 수 있는 자료를 많이 전달해 주셨다. '잘 녹아보자'라는 기분이 유독 많이 들었다. 균형을 잘 맞추려고 노력했다.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이 속도감이 '허진호 감독님 작품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속도감을 계속 찾아가신 것 같았고, 저도 멈추지 않으려고 했다."
Q. 재환은 처음부터 데일 듯 뜨거운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벌어지는 현상을 마주하며, 점차 뜨거워지는 온도를 그려내야 했다. 그 설계의 지점이 궁금하다.
"경직됨을 조금 버리려고 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폭발력이 필요한 인물이지만, 시대의 공기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표현해야 할 신문사에 기사를 재단하는 검열이 있지 않나. 그런 공간에서 느끼는 머뭇거림과 답답함, 눈치를 보는 현실적인 느낌을 살리려 했다. 단선적으로 가기보다 유연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허진호 감독님은 ‘캐릭터가 꼭 이래야만 할까?’ 하고 질문하는 분이다. 한 방향으로만 준비할 수 있는 현장이 아니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갈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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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 온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최종 수사 결과 발표 날의 모습이었다. 함께한 배우 유해진이 박해일의 눈빛을 극찬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날 밤에도 가서 연습을 많이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치고 들어가 기자로서 추궁하는 데까지 가야 하는 장면이라 부담이 컸다. 여러 번 찍었고 대사도 많이 틀렸다. 감독님이 괜찮다고 하며 끝까지 지켜봐 주셔서 용기를 내서 했다. 제게는 그 장면의 온도가 가장 뜨거웠던 것 같다. 동시에 무서운 장면이기도 했다. 질문했을 뿐인데 잡혀가는 상황 아닌가. 그런 공포가 이 영화의 결이라고 생각했다. 그 장면을 찍으며 재환의 톤을 많이 잡았다. 한 장면을 통과하며 캐릭터에 더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괴물' 때 합동 분향소 장면을 제일 처음 찍었다. 한 배우가 톤을 잡기 위해 강한 장면부터 하느냐, 가벼운 장면부터 하느냐,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가느냐는 차이가 있는데, 그 이야기 같다.”
Q. 그 장면이 있었기에, 자유언론실천선언 장면은 뜨거웠고 동시에 담백했다.
“신문사에는 주요 배우들뿐 아니라 다른 부서의 배우들과 계속 함께하는 보조 출연자들도 있었다. 그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연대감이 생겼다. 선언문을 외칠 때는 그분들의 온도가 나보다 더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카메라가 돌기 직전에는 내가 서퍼라면 오는 파도를 그대로 타보자는 기분이었다. 선언문을 외우고 갔지만 눈앞에서 여러 상황이 동시에 벌어지니 대사가 씹히기도 했다. 감독님은 오히려 그런 상황이라면 자연스러울 것 같다고 하셨다. 계산하기보다 상황에 나를 맡겼다. 두 번 정도 찍었는데, 많이 찍을수록 인위적일 수 있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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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재환은 언론인으로 소명을 가진 인물이다. 동시에 '좋은 어른'에 대해 보여주는 인물이라고도 느껴졌다.
“허진호 감독님이기에 재환을 그렇게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감독님에게 재환 같은 기질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현장에서도 어른 같으시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이야기하시니 한마디 한마디를 귀담아듣게 된다. 질문도 많이 하신다. ‘어떤 기분으로 연기한 거냐’라고 친절하게 물으신다. 배우에게는 그 질문이 마냥 편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웃음) 그래도 함께 공유하고 만들어가자는 태도다. 그러면 배우는 무장 해제된다. 나를 믿고 끝까지 호흡해 주신다는 생각이 드니 최대치를 끌어내게 된다. 그게 감독님의 장점이면서 재환의 장점 같다.”
Q. 다작을 하는 편은 아니다. 배우로서 가진 어떤 소신 때문일까.
“가진 게 많은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한 작품을 하면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끌어다 쓴다. 그러고 나면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갈 수 있는 기질이 아니라는 걸 인정했다. 잘했든 못했든 빠져나올 시간이 필요하다. 준비됐을 때 주어진 대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하다 보면 앞으로 할 작품이 정말 손에 꼽히겠다는 위기감도 들더라. 기운을 내서 힘을 쓰는 방식을 바꾸고, 연달아 해볼 수 있도록 조정하고 있다. 내가 전체적으로 많이 느린 편이다. 이제는 조금 달려가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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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러면 OTT 등 다른 플랫폼에서의 만남을 기대해도 될까.
“안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호흡의 길이나 매체를 대하는 태도가 다를 것 같아, 하면 다시 시작하는 느낌일 수는 있다. 그래도 언젠가 하게 될 수 있다. 무언가를 지켜내겠다는 태도는 아니다."
Q. "모든 것을 끌어다 쓴다"라고 이야기했다. 작품을 대할 때 다가가는 '박해일'만의 태도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는 배우다. 어떤 것을 요구하고, 그 장면에서 무엇을 바라는지 최대한 따라가고 흡수하려 한다. 상대 배우와 호흡하며 어떤 리듬을 만들 수 있을지도 생각한다. 그 중심에 감독이 있다. 그것은 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작품을 제안받고, 도전하고 싶고, 작품에 빨려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들면 최대한 해보고 싶은 대로 다 해보려고 노력한다. 감독님과 서로 만족스러운 것을 취하는 거다. 그런 작업의 연장선상인 것 같다. 그래서 서로 신뢰를 하게 된다. 서로의 장점도 알고, 한계도 알고, 공통적으로 즐길 만한 부분도 알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작품에서 저라는 배우의 쓰임새가 구체화되는 것 같다. 저는 충돌하고, 부딪히며 결과를 만들기보다, 유기적으로 섞이며 배려를 통해 오해를 줄여가며 결과물을 만드는 방식을 선호한다. 웬만하면 그러고 싶다. 그 방식이 제게 맞는 것 같다."
박해일에게 영화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된다. 감독과 만나 자기 모습을 내보이고, 작품 안에서 쓰일 수 있는 면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한산’의 이순신, ‘암살자(들)’의 재환이 탄생했다. 박찬욱 감독은 정서경 작가와 해준을 구상하며 “백지장으로 시작해서 신사적인 형사 캐릭터에서 출발해 보자, 예를 들면 박해일이라고 생각하자”라고 이야기했다. 허진호 감독 역시 “‘암살자(들)’ 대본을 보면서도 ‘이 역할은 딱 박해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주저 없이 적임자로 봤다”라고 밝혔다. 두 감독에게 박해일은 인물을 맡길 배우이자, 그 인물의 성품과 태도를 떠올리게 하는 출발점이었다. 그 믿음에는 배우로서의 역량과 함께, 사람 박해일을 향한 신뢰가 자리한다.
- 조명현 객원기자 midol13@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