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4일 서울 향린교회에서 자주통일평화연대·전국민중행동·불평등한한미SOFA개정국민연대 주최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반전·반기지운동 국제토론회'가 열렸다. 하와이, 필리핀, 괌, 오키나와와 한국의 군산·소성리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미군기지와 군사훈련이 지역 주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이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나눴다.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 견제를 내세워 동아시아와 태평양 곳곳에서 군사기지를 확대하고 다국적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있지만, 그 현장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에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와이의 림팩, 필리핀의 발리카탄, 괌의 군사기지화, 오키나와의 미군·자위대 기지 확대는 한국의 평택·군산 미군기지와 소성리 사드기지 문제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자주통일평화연대는 이번 토론회의 발표 내용을 바탕으로 매주 한 차례, 총 8회에 걸쳐 각 지역의 현실과 저항을 소개한다. 하와이의 미군 토지 임대와 반환운동을 시작으로 필리핀, 괌, 오키나와, 군산, 소성리를 차례로 살펴보고, 이어 미국 내 반제·반전·반기지 연대운동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및 동아시아 군사기지화를 짚어 본다.
서로 다른 지역의 이야기를 통해, 동아시아와 태평양 곳곳의 군사기지와 군사훈련이 어떻게 하나의 전략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이에 맞선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의 투쟁을 연결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세 번째로 프루테히 과한(Prutehi Guåhan)의 내크 플로레스 활동가가 발표한 내용을 소개한다.
프루테히 과한(Prutehi Guåhan·'괌을 지켜라'라는 뜻의 차모로어)은 미군 기지 확장과 실탄 사격장 건설로 위협받는 괌의 생태계와 조상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괌 원주민(차모로족) 중심의 풀뿌리 평화·환경 단체다. 아래 주요 내용이다.
재난의 폐허 속에서 강행되는 기지 확장과 전쟁 연습
불과 지난 몇 달 사이 마리아나 제도는 두 차례의 초강력 5등급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4월에는 슈퍼태풍 신라쿠가 우리 섬들을 강타했고, 7월에는 다시 슈퍼태풍 바비가 몰아쳤습니다. 특히 북마리아나제도 연방은 이 두 차례의 초강력 태풍으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태풍 피해를 복구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에도 마리아나 제도에서는 전례 없는 규모의 군사력 증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군사화는 기후위기에 취약한 우리 섬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으며, 우리가 최근 겪은 것과 같은 거대한 태풍을 견디고 피해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지역사회의 회복력마저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대응에 나서는 주체 역시 대부분 미군과 미국 연방정부입니다. 결국 이러한 현실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운동을 지속적으로 조직하는 일을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만듭니다.
태풍이 닥치기 전부터 우리 섬들은 이미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역 주민 상당수가 군에 복무하거나 미국 연방정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식민지라는 현실 때문에 빈곤과 의존의 악순환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고, 우리를 군산복합체와 전쟁경제에 계속 얽매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재난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전쟁연습
태풍은 전력과 수도 등 기반시설과 수많은 주택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여러 가정이 몇 주 동안, 길게는 한 달 넘게 전기와 수도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미군의 군사훈련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여러 사업 계획에 대한 의견수렴 절차 역시 그대로 진행됐습니다.
초강력 태풍으로 전기가 끊기고 휴대전화와 인터넷 서비스마저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이러한 의견수렴 절차에 참여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두 번째 태풍이 닥치기 불과 이틀 전에는 마리아나 제도에서 '밸리언트 실드(Valiant Shield)' 군사훈련이 벌어졌습니다. 격년으로 실시되는 이 군사훈련은 하와이의 땅과 바다, 지역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RIMPAC·림팩)을 앞두고 진행됩니다.
밸리언트 실드 역시 림팩과 마찬가지로 퇴역 군함을 바다로 끌고 나간 뒤 전투기와 잠수함에서 폭탄과 어뢰를 발사해 침몰시키는 '침몰훈련(SINKEX)'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폭파된 함정의 잔해는 그대로 바다에 남겨지며, 이를 수거하거나 오염을 정화하는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보잉사는 괌 바로 북쪽에 있는 로타섬에서 자사의 '고스트 배트(Ghost Bat)' 무인기가 운용된 사실을 자랑스럽게 홍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훈련과 첨단 무기 운용이 이어지는 동안, 로타섬은 불과 며칠 뒤 태풍 바비의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우리 주민들은 주거 불안과 식량 불안, 의료서비스 부족이라는 여러 위기에 동시에 직면해 있습니다. 태풍 피해를 복구하고 있는 지금, 이것들이야말로 주민들이 실제로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안보' 문제입니다. 그러나 미군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계속해서 피해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괌의 30%를 차지한 미군기지
현재 괌 전체 면적의 약 30%를 미군기지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괌정부가 소유한 토지는 19%에 불과합니다. 괌의 전체 인구는 약 15만 3천 명 수준이나, 여기에 2만 1천 명이 넘는 미군 주둔 병력과 군무원 가족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듯 괌은 이른바 '제2도련선(second island chain)'의 일부입니다. 미국은 태평양 전역에서 미크로네시아연방과 팔라우공화국을 비롯한 여러 주권국가들을 미군의 전력 투사 거점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 섬과 태평양의 여러 지역을 전쟁을 위한 활동 무대로 삼고, 제국주의적 군사 지배를 확대하려 하고 있습니다.
심해채굴이라는 또 다른 식민지 자원 약탈
괌을 비롯한 미 점령지에서 자원을 둘러싼 식민주의적 약탈도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마리아나 제도와 아메리칸사모아 일대에서 심해 광물 채굴 인허가 절차를 신속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태평양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파괴적인 피해를 가져올 수 있으며, 우리의 주권에 대한 공격이기도 합니다.
심해에서 채굴하려는 광물은 무기 생산과 군사용 인공지능 기술에 사용됩니다. 동시에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로부터 이러한 광물을 구매해야 하는 미국의 의존도를 줄이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더욱이 심해채굴 대상 지역은 미군이 대규모 군사훈련과 무기시험을 벌이는 '마리아나 제도 시험·훈련구역(Mariana Islands Testing and Training Area)'과 겹칩니다. 이미 군사훈련과 무기시험으로 지속적인 환경 부담을 받고 있는 바다에 심해채굴이라는 또 다른 대규모 개발이 더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인 바다가 한편에서는 군사훈련장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방위산업과 첨단 군사기술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태평양에 남겨진 군사 오염의 유산
우리 모두는 오랜 세월에 걸친 군사 오염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고엽제인 에이전트 오렌지, 딜드린, PFAS와 PFOS, 납, PCB, 기름 유출, 불발탄, 그리고 마셜제도에서 자행된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능 오염까지. 태평양의 섬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군사적 오염을 감당해 왔습니다.
괌은 미국의 주가 아닌 미국령이라는 정치적 지위 때문에, 미군의 활동으로 피해를 입더라도 미국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거나 책임을 묻는 데 큰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주변의 미크로네시아연방이나 팔라우 같은 독립국가들도 사정은 다르지만, 미국과 맺은 안보협정에 따라 미군에 광범위한 군사적 권한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섬들은 권리는 박탈당한 채 미군의 군사적 전초기지이자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미 공군을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선 괌 주민들
오는 10월 7일, 우리 단체를 대리하는 환경법률단체 어스저스티스(Earthjustice)의 변호사들이 '미 공군 대 프루테히 과한(U.S. Air Force v. Prutehi Guåhan)'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에서 구두변론에 나설 예정입니다.
우리는 미 공군이 야외 폭발처리(open detonation)를 추진하면서 국가환경정책법(NEPA)을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미 공군은 환경에 미칠 영향과 주민 건강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분석하지 않았고, 더 안전한 대안이 있는지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습니다. 지역사회와의 충분한 협의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미 공군은 우리 단체를 상대로 맞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우리는 앞선 항소심에서 승소했고 사건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 공군의 맞소송으로 우리 주민들이 요구해 온 정의의 실현은 또다시 늦춰지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위험한 폭발작업이 괌 주민들이 의존하는 유일한 지하수원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해당 토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제 수용권을 통해 차모루(CHamoru) 주민들에게서 빼앗은 땅이기도 합니다.
미국은 과거 우리 섬들에 수천 파운드에 달하는 폭발물을 퍼부었고, 그 결과 지금까지도 마리아나 제도 곳곳에 수많은 불발탄이 남아 있습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출격지, 티니안
괌 북쪽 티니안섬에는 비상전개 비행장이 있습니다. 티니안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한 핵폭탄을 싣고 출격한 폭격기가 떠났던 바로 그 섬입니다.
미군은 다시 이 시설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괌이 공격받을 경우 미군 병력과 장비를 티니안으로 신속하게 이동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과한에서 한국까지, 우리가 함께 요구하는 것
팔레스타인에서 감행되는 집단학살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바로 그 군수기업들이 마리아나 제도의 군사력 확장 과정에서도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나 일대에서는 가자지구에 투입되는 것과 동일한 무기와 전쟁 기술이 훈련되고 시험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지속적인 점령과 강제 분단, 그리고 이로 인해 계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전쟁 상태 역시 우리의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분과 손잡고 다음과 같이 한목소리로 요구합니다.
우리는 모든 전쟁 연습의 중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환경 오염물질에 대한 정화 및 복원, 미군 기지의 철수, 그리고 수탈된 토지의 반환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과거 및 현재 진행 중인 미군에 의한 성폭력 범죄와 일체의 전쟁 범죄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역사 정의 실현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모든 점령지에서의 완전한 비식민화(Decolonization)를 위해 투쟁하며, 심해 광물 채굴과 식민지적 자원 수탈에 저항합니다.
과한(Guåhan)에서 한국까지,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연대하며 함께 행동할 것을 약속합니다.
미 제국주의와 군산복합체에 맞서 함께 투쟁하고 협력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Si Yu'us Ma'åse').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