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암살자(들)'에서 유해진은 거창한 히어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쩌면 유해진이 맡은 '박철구' 같은 인물 한 명, 한 명이 정말 거창한 히어로인지도 모른다. ‘1987’, ‘택시 운전사’에 이어 다시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진실을 향해가는 유해진의 발걸음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다.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영부인 저격 사건의 의혹과 배후를 추적하는 작품이다. 유해진이 맡은 중부서 경감 박철구는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지닌 인물이다. 현장 경호를 함께했던 동료가 사건의 책임을 떠안고 끌려간 뒤, 철구는 공식 발표와 실제 정황 사이의 모순을 마주하며 자신이 믿어온 것들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실제 사건을 다루는 만큼 유해진은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조심스럽다’라는 생각이 가장 강렬했다”라고 밝혔다. 그렇기에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유해진은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단어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철구'를 향해갔다. 그 신중한 접근의 바탕에는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소명이 있었다. 배우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철구는 그가 "내 직업(배우)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이런 게 아닌가." 유해진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
Q. '암살자(들)'은 1974년 실제로 벌어진 영부인 저격 사건을 중심에 둔 이야기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의 인상이 궁금하다.
"‘조심스럽다’라는 생각이 가장 강렬했다. 그런데 ‘왕사남’이 옛 기록을 가지고 뒷이야기를 만들어 단종을 생각하게 한 작품이듯, 물음표로 남아 있는 사건도 영화를 통해 한 번쯤 더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게 영화가 할 수 있는 큰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Q. 그런 지점에서 허진호 감독님과 대화하며 조율해 나간 부분도 있었을 것 같다.
"탄알, 탄피, 탄흔처럼 생소한 단어들이 있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도 잘 모르겠더라. 그런 것부터 조금 더 단순하게 전달하자고 이야기했다. 조심스러운 내용이다 보니 “이건 조금 더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고 의견을 나눈 지점도 있었다. 저는 처음 읽는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렇게 받아들였다'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잘못 읽었다면 설명을 듣고 이해하면 된다. 처음 보는 사람의 시선을 전달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조율하는 지점은 어느 작품에나 있는 것 같다."
Q. 철구는 경감이기도 하지만, 두 아이를 둔 집안의 가장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관객이 공감하고, '암살자(들)'로 진입하는 구간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감정선을 만들어 나갔나.
"철구가 태극기를 보며 등을 돌리는 장면이 감정적으로 가장 고점에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애국 시민이었다가 알수없는 '물음표'들을 겪고 마주할 때의 절망이 담겨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폭력과 탄압도 있었다. 저에게는 그 부분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끝내 진실을 놓으려 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
Q. 경축 행사의 피격 장면부터 강렬했다. 말미의 실제 장면과도 많은 지점이 겹쳐졌다.
"그게 중요했다. 이모개 촬영 감독님께서 너무 디테일하게 훌륭히 잘 찍어주셨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박정민이 총 갖고 뛸 때, 그 장면은 드론으로 찍은 거다. 그게 너무 기가 막히게 다가왔다. 저 긴장감을 저 각도로 담는 촬영 감독님께 감탄했다. 그 장면을 굉장히 오래 찍었다. 여러 가설을 모두 담아야 했다. 그 부분이 잘 전달되어야 했기에 공을 많이 들였던 장면 같다."
Q. 기자 역을 맡은 배우 박해일, 이민호와의 호흡도 좋았다.
"박해일은 세월이 지났으니, 눈빛의 힘이나 에너지가 조금은 달라졌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니, 어떻게 저렇게 꼿꼿하고 꿋꿋하게, 큰 에너지로 표현할 수 있는지 감탄했다. 이민호와는 첫 작업이었다. 스타로만 알고 있었다. 이번에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한류스타이기에 무게를 잡을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굉장히 서글서글하고 살갑게 다가왔다. 배우로서의 변화에 대해서도 늘 고민하는 친구 같았다."
Q. 영화 '1987', '택시운전사'에 이어 '암살자(들)'에서도 진실을 향해가는 인물을 그렸다. 그런 이야기가 찾아오는 걸 수도 있고, 끌리는 걸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인가.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내 직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이런 게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배우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Q. 지난 5월 진행된 '제6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영화 부문 대상을 받았다. 그 후 선보이는 작품이기에, 부담감이 있을 것 같다.
"부담감이 있다. 그나마 조금 덜 수 있는 건 1/N이라는 점이 아닐까(웃음). 박해일, 이민호 등 좋은 배우들이 함께하지 않나."
Q.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1,692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며 누적 관객 수 2위에 올랐다. 백상예술대상 때 수상소감처럼 "조연상이면 됐다"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대상을 받은 배우가 됐다. 대중이 "전 국민이 만장일치하는 상",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상"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을 마주하며 스스로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가.
"정말 감사하게 느끼게끔 해주시더라. 제 수상소감 댓글이 엄청 좋은 이야기들이다. 사실 댓글 보고 엄청 좋았다. 너무 감사하며 혼자 술을 마시면서 읽어 내려갔다. 저 자신에게는 '수고했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조연상으로 정말 충분히,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했다. 욕심이 없었는데, 대상을 받으니, 기분이 좋더라. 대상이라서인지, 지난 시간에 더욱 '수고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행복과는 다른 의미로 '럭키'한 사람이다. 열심히 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나.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
Q. 그 생각의 연장선상으로, 지난 박경림의 토크 콘서트에서 눈물을 보인 건가.
"박경림이 게스트 요청을 해서, 출연하게 됐다. 그래서 살면서 마의 구간이었던 때, 힘들었던 시절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박경림이 저를 섭외한 이유가 '힘들었던 시간을 딛고 일어선 사람'을 떠올릴 때, 제가 떠올랐다고 이야기했다. 살면서 누군들 안 힘들겠나. 나이를 먹어가니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라는 지점이 확 다가오더라. '유해진도 힘든 시간이 있었구나, 나도 힘내자'라고 생각하고 오신 분들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여러분 힘내십시오'라는 이야기는 안 하고 싶더라.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온 분들에게 또 힘내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힘내지 말고, 지금까지 잘 해왔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저는 제 뒤에 화면이 그렇게 큰 줄 몰랐다. 그냥 '너무 힘내지 않아도 된다'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감정이 막 올라왔다."
Q. 더 삶의 온도가 높아진 느낌이다. 배우로서 앞으로 작품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 같다.
"'늘 그랬듯 내가 관심이 가는가'라는 지점이 작품을 선택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다. 시리즈도 좋은 작품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다만, 제 터전이 영화라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암살자(들)'도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렇게 열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영화의 큰 매력 중 하나다. 그런 시간이 없으면 스트레스받을 것 같다. 그 매력 때문에 계속 영화를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유해진에게 진실을 좇는 인물을 연기하는 일은 자신의 직업으로 세상에 말을 건네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읽는 시선을 소중히 여기고, 작품을 통해 여전히 새로운 힘을 발견한다. 그렇게 완성한 ‘암살자(들)’에는 배우로서의 집요함과 평범한 삶을 향한 애정이 함께 담겼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지금처럼 사세요.” 힘내라는 말 대신 그가 건네고 싶었다는 위로가, 진실 앞에서 자기 몫의 선택을 하는 철구의 얼굴과 겹쳐지며 오래도록 남는다.
- 조명현 객원기자 midol13@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