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역사는 거대한 사건의 이름으로 기록되지만,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에게 역사는 매일의 선택이었다. 누구와 함께할 것인지, 무엇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대가를 감당할 것인지. 뮤지컬 '아나키스트'는 바로 그 선택의 순간을 청춘의 언어로 끌어온다.
일제강점기 베이징과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는 덕형, 자경, 무혁이라는 세 청년이 등장한다. 이들은 처음부터 특별한 영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함께 웃고 미래를 이야기하며 각자의 꿈을 품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을 꿈꾸며 상하이로 향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이전과 다른 국면에 들어선다.
세 청년이 꿈꾸는 '이상촌'은 작품을 움직이는 중요한 배경이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거창한 구호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출발점은 의외로 소박하다.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다. 문제는 이상을 현실로 옮기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꿈은 공유할 수 있지만 선택까지 같을 수는 없다. 덕형과 자경, 무혁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녔다. 한 사람이 옳다고 믿는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 될 수 있다. 작품은 바로 이 간극을 세 사람의 관계 속에서 풀어낸다.
이 때문에 '아나키스트'에서 우정은 감상적인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세 인물에게 우정은 자신이 믿는 것과 충돌할 수 있는 현실적인 관계다. 친구이기 때문에 이해해야 하지만,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선택에 동의할 수는 없다. 이상과 관계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은 역사적 배경보다 오히려 현재의 관객에게 가까운 방식으로 다가온다.
작품이 일제강점기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의 청년들에게 자유와 독립,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은 삶 자체와 맞닿아 있었다. 정치적 신념은 책 속 개념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관계와 개인의 미래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나키스트'는 이러한 시대를 거대한 역사극의 문법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을 앞세우기보다 그 시대를 살아간 젊은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친구를 바라보고 미래를 상상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작품 속 갈등은 특정 시대에만 존재했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익숙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특히 작품의 분위기는 무거운 역사극과 거리가 있다. 세 청년의 대화에는 유쾌함이 있고, 음악에는 빠른 호흡이 살아 있다. 웃음과 활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로의 생각이 충돌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그 변화가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작품이 역사적 배경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법과도 연결된다. 역사적 지식을 먼저 요구하기보다 인물의 관계를 따라가게 하고, 그 관계를 통해 시대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관객은 세 사람의 우정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놓인 시대적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음악은 그 과정을 더욱 직접적으로 만든다. 작곡과 음악감독을 맡은 허수현은 인물들의 감정을 빠른 템포와 강한 에너지로 풀어낸다. 세 청년의 패기와 불안, 갈등이 음악 안에서 교차하면서 이야기의 속도를 끌어올린다. 음악이 단순히 대사를 연결하는 역할을 넘어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언어로 기능하는 셈이다.
배우들의 해석에 따라 같은 이야기가 다른 온도로 전달된다는 점도 재연의 특징이다. 덕형 역에는 김도빈, 최호승, 이진혁, 이지연이 출연하며 자경 역은 정재환, 정우연, 박좌헌, 김재한이 맡는다. 무혁 역에는 진호, 홍나현, 박준형, 박주혁이 참여한다.
이번 시즌에는 여성 배우들이 새롭게 합류했다. 이는 단순히 출연진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같은 인물을 연기하더라도 배우가 가진 감정의 표현 방식과 상대 배우와의 호흡에 따라 세 사람의 관계가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 조합마다 인물의 성격과 관계가 달라지는 만큼 재연은 초연과 또 다른 감상 경험을 만들어낸다.
2025년 초연을 거친 작품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창작뮤지컬은 초연 이후 작품의 완성도를 다듬는 과정에서 서사와 인물, 음악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아나키스트' 역시 이번 재연에서 새로운 배우들을 받아들이며 작품이 가진 청춘극의 에너지를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연출을 맡은 김태형은 역사적 무게에 눌리지 않도록 인물들의 움직임과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작가 안리준이 구축한 세 청년의 이야기에 작곡·음악감독 허수현의 음악, 안무가 류정아의 움직임이 더해지면서 무대는 정적인 역사극보다 생동감 있는 청춘극에 가까워진다.
여기서 '아나키스트'라는 제목도 다시 보게 된다. 작품은 특정 이념을 관객에게 설명하거나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는 방식보다, 자유와 평등을 꿈꾸는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상을 이야기하는 일과 실제 삶에서 그 이상을 지키는 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세 청년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무엇보다 작품이 붙잡는 것은 선택 이후의 감정이다. 어떤 결정을 내린 뒤에도 사람은 흔들릴 수 있고, 자신의 선택 때문에 가까운 사람과 멀어질 수도 있다. '아나키스트'는 그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다. 신념을 가진 인물도 고민하고, 우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도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그래서 작품 속 청춘은 낭만으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뜨거운 열정 뒤에는 두려움이 있고, 자유를 향한 외침 뒤에는 책임이 따른다. 함께 꿈꾸는 일만큼 서로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도 어렵다는 사실이 세 인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역사극의 가치는 과거를 재현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과거의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 보여줄 때 그 이야기는 현재와 만난다. '아나키스트' 역시 일제강점기라는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작품이 들려주는 우정과 선택, 이상과 현실의 갈등은 시대를 넘어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이야기다.
2026년 재연은 그 가능성을 새로운 배우들과 함께 다시 확인하는 자리다. 초연에서 구축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배우들의 조합을 달리하고 음악과 움직임의 에너지를 강화하면서 작품의 청춘극적인 색채를 넓혔다.
결국 '아나키스트'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은 거대한 역사보다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려 했던 세 사람이다.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 친구와 같은 꿈을 바라보는 일, 그리고 서로 다른 선택을 받아들이는 일. 작품은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청춘을 통해 이상이 현실과 만나는 순간 어떤 감정이 생겨나는지를 보여준다.
뮤지컬 '아나키스트'는 오는 12월 6일까지 대학로 예스24아트원 1관에서 공연된다. 덕형 역 김도빈·최호승·이진혁·이지연, 자경 역 정재환·정우연·박좌헌·김재한, 무혁 역 진호·홍나현·박준형·박주혁이 무대에 오른다. 작가는 안리준, 작곡·음악감독은 허수현, 연출은 김태형, 안무는 류정아가 맡았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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