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율 이정은 대표가 18년의 기록을 담아 펴낸 《채율하다》를 읽으며 다시 이 질문을 생각한다. 이 책은 한 기업인의 성공담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공예가 왜 훌륭한 기술과 작품에 머물지 않고, 세계가 인정하는 지속 가능한 브랜드로 성장하기 어려웠는지를 한 경영자의 현장 경험으로 들여다본 기록이다.
채율의 시작은 2008년 뉴욕이었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 고유의 소재와 기술, 장인정신을 세대에 걸쳐 축적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 대표는 숭례문 화재 소식을 접했다. 수백 년을 이어온 문화유산도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강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 전통도 세계적인 브랜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이 채율의 출발이었다. 이정은 대표가 선택한 것은 자개와 옻칠이었다. 익숙하지만 동시에 현대의 소비시장에서는 낯설어진 전통 재료다. 채율은 이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현대적인 디자인과 쓰임을 입혔다. 전통을 박물관 안에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생활 속으로 끌어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채율의 18년을 다시 보게 된다. 전통을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어쩌면 전통이 다시 선택받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좋은 장인이 있다고 명품 브랜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작품 하나가 있다고 세계적인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소재와 기술, 디자인, 철학, 시장, 고객 경험, 유통 그리고 다음 세대의 장인까지 하나의 생태계로 묶어야 한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오랜 시간 살아남은 이유도 결국 제품 하나가 아니라 시간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채율 역시 지난 18년 동안 그 시간을 만들어왔다. 해외 시장에 작품을 선보이고, 루이비통과 리델 등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하며 한국의 전통 재료와 장인 기술을 동시대의 제품으로 확장했다. 하지만 《채율하다》에서 더 중요한 것은 화려한 협업이나 유명 인사의 소장 이력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꿨는지,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가 책의 중심에 놓인다. 이 대표가 생각하는 명품도 같은 맥락이다. 높은 가격이나 유명인의 선택이 명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품질과 신뢰를 지키는 태도가 명품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후반부에서 질문은 한 단계 더 깊어진다.
“그렇다면 그 시간을 누가 이어갈 것인가.” 이 대표가 다음 목표로 ‘채율장인학교’를 구상하는 이유다.
장인의 기술이 한 세대에서 끊기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하는 것.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 그 기술로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브랜드가 장인의 기술을 사용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장인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지난 열여덟 해 동안 채율이 물건의 시간을 이어왔다면, 앞으로는 그 물건을 만들어갈 사람의 시간을 잇고 싶다.”
이 한 문장이 《채율하다》의 방향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 한국 명품이 드문 이유를 단순히 자본이나 시장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좋은 기술을 발견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시장에 내놓고, 실패를 견디고, 장인에게 투자하고, 다음 세대를 기다리는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명품은 ‘비싼 물건’이 아니라 시간을 견딘 브랜드의 태도에 가깝다. 한국 문화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다음 단계일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에서 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50년 뒤, 100년 뒤에도 한국의 이름으로 남을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다.
《채율하다》는 그 가능성에 대한 정답을 선언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18년 동안 한 브랜드를 끌고 온 경영자가 현장에서 던지는 질문에 가깝다.
전통은 어떻게 브랜드가 되는가. 브랜드는 어떻게 시간이 되는가. 그리고 그 시간은 다음 세대에 어떻게 이어지는가. 18년 전 뉴욕에서 시작된 이정은 대표의 질문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어쩌면 한국적 럭셔리의 진짜 경쟁은 이제부터 시작인지도 모른다.
Copyright ⓒ 문화저널코리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