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대중문화와 함께해 온 일간스포츠의 창간 57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한국 대중문화의 중심에서 이어갈 멋진 여정을 기대하겠습니다.”
서른이면 뜻을 세운다는 ‘이립(而立)’. 1997년 패션잡지로 연예계에 발을 디딘 조여정은 어느덧 데뷔 30년 차 ‘관록’의 배우가 됐다. 대중과 긴 세월 호흡하며 순간을 기록하고 전하는 일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그래서 대중문화의 역사를 57년간 기록해온 일간스포츠의 생일을 더욱 뜻깊게 축하했다.
조여정은 최근 일간스포츠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이어갈 ‘여정’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기생충’ 이후에도 ‘히든 페이스’, ‘좀비딸’, ‘살인자 리포트’, ‘메이드 인 코리아’ 등 장르와 캐릭터를 가리지 않고 쉼 없이 새로운 얼굴을 꺼내 보인 ‘다작의 여왕’이다. 하지만 작품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한결같다. 바로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이야기와 캐릭터는 없다’는 것이다.
“매번 전혀 다른 장르의 작품을 만날 순 없어요.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다르게 생각하고 변화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또 그것이 배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여정의 30년은 익숙함보다 변화에 가깝다. 매 작품 조금씩 다른 얼굴을 꺼내 보이며 여전히 ‘다음’을 궁금하게 만드는 것. 일간스포츠가 앞으로 펼쳐질 조여정의 시간까지 계속 기록하고 싶은 이유다.
실제로 일간스포츠는 지난 9월 4일 조여정이 쿠팡플레이 ‘지금 불륜이 문제가 아닙니다’(이하 ‘지금 불륜’)에서 보여준 연기 변신과 그 안에 쌓인 배우로서의 내공을 지면에 담았다. 단순히 ‘잘했다’는 평가에 그치지 않고, 작품마다 익숙함을 벗어 던지려는 조여정의 변화와 이를 바라보는 업계의 시선까지 함께 짚었다.
‘지금 불륜’은 불륜으로 얽힌 이웃집 부부가 걷잡을 수 없는 사건과 비밀에 휘말리는 연쇄 추돌 블랙 코미디다. 조여정은 극중 우아하고 교양 있는 피부과 원장 안수정을 연기했다. 겉으로만 보면 ‘기생충’의 연교를 떠올릴 법한 인물이지만, 조여정이 앞서 강조한 ‘변화’는 안수정에게 전혀 다른 얼굴을 입혔다.
“처음에는 사람을 경계하고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을 것 같은 고고한 분위기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코너에 몰리고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우아함이나 품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본성에서 튀어나오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비겁하고 때로는 유치한 모습까지 기꺼이 꺼내 보여주려고 노력했죠.”
조여정의 열연에 힘입어 ‘지금 불륜’은 쿠팡플레이 사상 최초 1000만 이용자를 돌파했다. 조여정이 작품을 마친 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숫자로 남은 성과보다 치열했던 현장이다. 쉽지 않은 캐릭터와 작품을 끝까지 끌고 온 시간을 돌아본 그는 “어려운 산을 무사히 넘은 것 같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산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이 남았다. 늘 현장에는 배우고 성장할 것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조여정이 연기를 대하는 태도다. 특히 ‘지금 불륜’을 통해 자신의 연기만 잘 해내는 것을 넘어 작품 전체를 바라보고 함께하는 이들까지 살필 줄 아는 자세를 다시금 배웠다.
“한 작품을 책임지고 끌어가기 위해서는 연기뿐만 아니라 폭넓은 배려와 시야가 필요하다는 것을 또 한 번 배울 수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런 부분을 직접 경험하고 배울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조여정의 배우 인생은 어쩌면 산을 오르는 일과 닮았다. 작품이라는 하나의 산을 만나 치열하게 오르고, 정상에 다다르면 잠시 숨을 고른 뒤 또 다른 산을 향한다.
그다음 ‘여정’에서 조여정은 조금 특별한 질문과 마주했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을 통해서다. 23일 개봉한 이 영화는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과 아내 미옥(전도연), 이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와 부유한 남편 상우(조인성)의 만남에서 출발한다.
‘가능한 사랑’이 흥미로운 건 영화가 품은 질문이 작품 밖 이창동 감독의 오랜 고민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이 감독은 10여 년 전에도 전도연, 설경구와 함께 대기업의 집단 정리해고 문제를 다룬 영화를 준비했지만 끝내 작업을 중단했다. 타인의 고통을 영화로 가져와 이야기하는 자신에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가라는 물음 때문이었다.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던 고민은 시간이 흐르며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타인의 고통을 카메라에 담는 일이 단순한 ‘소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다시 출발한 이야기가 ‘가능한 사랑’으로 이어졌고, 조여정이 연기한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는 그 질문을 가장 가까이에서 끌어안는 인물이 됐다.
오랜 고민 끝에 완성된 작품에 세계 무대도 응답했다. 이창동 감독은 지난 12일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수상의 기쁨을 나누는 순간에는 조여정과 얽힌 일화도 등장했다. 이 감독은 수상 소감으로 “조여정 씨가 좋은 꿈을 꿨다고 해서 샀습니다. 한국에서 그런 풍습이 있는데 그 꿈이 이런 행운을 가져온 것 같다”고 말했다.
좋은 꿈까지 나눌 만큼 가까이 호흡한 시간은 조여정에게도 특별했다. 수많은 현장을 거쳐온 그에게 이창동 감독과의 작업은 배우로서 ‘연기하는 행복’을 새삼 느끼게 한 시간으로 남았다.
“모든 작품은 저를 성장하게 해주지만, 이창동 감독님과의 작업을 통해 배우로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경험했습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이후 만나는 작품들을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목표 역시 특정 작품이나 상에 있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물을 익숙한 방식으로 단정 짓지 않고 매 순간 새롭게 고민하는 것. 그저 조여정은 “매 순간 건강하게 사고하고, 하나하나 의미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가고 싶은 바람뿐”이라고 말했다.
결국 조여정이 원하는 것은 ‘오래 연기한 배우’보다 ‘오래 궁금한 배우’에 가깝다. 어찌 보면 그 바람은 이미 어느 정도 이뤄진 듯하다. 단순히 조여정이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작품에서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 궁금증이 커지니 말이다. 아직 개봉 시기조차 베일에 싸인 홍의정 감독의 영화 ‘복수귀’에서도 조여정은 주보 역을 맡아 이승과 저승을 잇는 강렬한 캐릭터로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전망이다.
“언제 봐도 재미있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라는 궁금증을 줄 수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습니다. 일간스포츠의 창간 57주년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고, 독자 여러분도 사랑하는 분들과 따뜻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 좋은 작품과 새로운 모습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Copyright ⓒ 일간스포츠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