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서민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다. 의류·전자제품 구매 등에 주로 활용되던 선구매 후결제(BNPL·Buy Now, Pay Later)가 최근 식료품과 배달음식은 물론 의료비와 월세 등 생계와 직결된 영역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당장 쓸 현금이 부족해 생활비마저 할부성 결제에 의존하는 가계가 빠르게 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향후 빚을 제때 갚기 어려운 가계가 늘어날 경우 그동안 미국 경제를 떠받쳐 온 소비 여력이 약화돼 그 피해가 전 세계에 미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식료품·월세까지 파고든 할부 거래…가계부채·연체 부담에 美 서민경제 '경고등'
16일(현지시간) 미국 신용정보업체 렌딩트리(LendingTree)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BNPL 이용자 가운데 29%는 식료품 구매에 관련 서비스를 이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해당 비율은 2024년 14%, 지난해 25% 등 꾸준히 상승 중이다. 올해 식료품은 의류·신발(39%), 전자기기(34%)에 이어 BNPL 이용 비중이 높은 품목 3위에 올랐다. BNPL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먼저 구매한 뒤 대금을 일정 기간에 걸쳐 나눠 내는 후불·분할결제 서비스다. 신용카드 할부와 유사하지만 별도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지 않고 앱이나 매장 내 키오스크를 통해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는 클라르나(Klarna), 어펌(Affirm), 애프터페이(Afterpay) 등이 주요 BNPL 사업자로 꼽힌다.
BNPL의 대표적인 상품은 결제대금을 네 차례에 걸쳐 나눠 내는 '페이 인 포(Pay in 4)'다. 가령 100달러짜리 상품을 구매한다고 가정했을 때, 결제 시점에 25달러를 내고 이후 2주 간격으로 25달러씩 세 차례 추가 납부하는 방식이다. 통상 정해진 기한 내 대금을 납부하면 별도의 이자가 붙지 않아 청년 소비자들의 호응이 유독 높은 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따르면 지난해 18~29세의 BNPL 이용률은 22%를 기록했으며 이용 목적의 대부분은 식료품 구매나 음식 배달이었다. 특히 식료품·음식 배달에 BNPL을 이용한 응답자의 45%는 "해당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BNPL이었다"고 답했다.
올해 들어서는 BNPL의 활용 범위가 식료품·배달음식을 넘어 주거비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렌딩트리에 따르면 BNPL 이용자의 13%는 월세 납부에 관련 서비스를 이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최근에는 임대료 전용 분할 결제 서비스인 'RNPL(Rent Now, Pay Later)'을 제공하는 플렉스(Flex), 리브블(Livble) 등의 플랫폼도 시장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다. 해당 플랫폼이 세입자를 대신해 임대인에게 월세를 먼저 지급하면 세입자가 해당 금액과 수수료를 플랫폼에 분할 상환하는 방식이다.
단순 소비재 구매를 넘어 생활비, 주거비 등으로 BNPL 활용 범위가 넓어지면서 주요 BNPL 업체들의 거래 규모와 이용자 수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스웨덴계 BNPL 업체 클라르나(Klarna)의 올해 2분기 총거래액(GMV)은 366억달러(한화 약 51조원)로 전년 동기 대비 18% 증가했다. 같은 기간 매출은 10억4200만달러(한화 약 1조4400억원)로 27% 늘었다. 활성 이용자 수는 1억2000만명으로 8%, 가맹점 수는 120만8000곳으로 54% 각각 증가했다. 클라르나는 세계 주요 시장 가운데 높은 성장세를 보인 지역으로 미국을 지목했다. 미국 BNPL 업체 어펌(Affirm)의 활성 이용자 수도 올해 6월 말 기준 약 2778만명으로 전년 대비 21% 증가했다.
미국 현지에서는 BNPL 확산에 따른 가계 채무 누적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신용카드 한도와 별개로 복수의 BNPL 서비스를 동시 이용할 경우 채무가 단기간에 불어나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여러 장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하는 것과 흡사한 개념이다. 실제 렌딩트리 조사에 따르면 올해 BNPL 이용자의 63%가 여러 건의 서비스를 동시에 이용한 경험이 있었으며 3건 이상 다중 이용했다고 답한 비중도 25%에 달했다.
문제는 이러한 단기 채무 증가 현상 가계부채 부실 문제와 맞물려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2분기 미국 전체 가계부채는 18조7710억달러를 기록했다. 이 중 신용카드 잔액은 직전 분기 대비 210억달러 늘어난 1조2630억달러, 자동차 대출 잔액은 280억달러 증가한 1조7130억달러로 각각 집계됐다. 연체 지표에서도 위험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올해 2분기 신용카드 잔액 가운데 90일 이상 심각한 연체 상태로 새롭게 전환된 비율은 6.97%로 전년 동기(6.93%) 대비 소폭 상승했다. 자동차대출의 심각 연체 전환율도 같은 기간 2.93%에서 3.00%로 높아졌다.
가계의 채무 상환 여력과 고용 시장에 대한 불안감도 커지는 추세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8월 소비자 기대조사' 결과에 따르면 향후 3개월 내 최소 채무 상환액을 납부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한 평균 확률은 전월 대비 1.2%p 상승한 13.2%로 집계됐다. 최근 12개월 평균치(12.7%)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1년 뒤 미국 실업률이 현 수준보다 높아질 것으로 내다본 평균 확률 역시 44.4%까지 치솟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인 2020년 4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현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 경제의 핵심 축인 민간 소비시장의 위기 신호가 감지되고 있는 만큼 그 여파가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프랜시스 도널드 캐나다왕립은행(RBC)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고금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의 신용 의존도가 높아지면 연체율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이는 결국 미국 경제의 최대 성장 동력인 소비를 제약하는 직접적 요인이 될 것이다"고 분석했다. 마크 잔디 무디스 애널리틱스 수석이코노미스트 역시 "가계가 이미 상당한 재정적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식료품과 월세 등 일상적인 지출까지 분할결제에 의존하는 현상은 소비자들의 현금 여력이 그만큼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고 진단했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BNPL은 일시적인 자금 부족을 보완하는 금융수단으로 식료품이나 월세처럼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필수지출까지 BNPL에 의존하는 가계가 늘고 있다는 것은 미국 소비자의 현금흐름이 그만큼 취약해지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며 "신용카드 부채와 연체 부담이 높은 상황에서 단기 신용에 대한 의존이 계속 커지면 당장은 소비가 유지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미래의 소비 여력을 앞당겨 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세계 최대 소비 시장인 만큼 가계의 채무 부담이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면 그 여파가 미국 내부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며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역시 자동차·전자 등 완제품은 물론 관련 중간재 수요 감소로 이어져 국내 기업 실적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 가계의 신용 의존 확대를 단순한 현지 결제 트렌드가 아닌, 국내 수출과 경기를 위협하는 대외 변수로 보고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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