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18세 피아니스트 이정우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제20회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 정상에 오른 것이다. 청중상과 ‘École Cortot Prize’, ‘Playing for Tomorrow Prize’, ‘Radu Lupu Prize’, 위촉 지정곡 최고 연주상까지 더해지며 이번 대회에서 여러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이정우의 이번 행보를 수상 목록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히려 눈여겨볼 부분은 18세의 피아니스트가 국제 콩쿠르의 여러 단계에서 어떤 작품을 선택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음악으로 만들어갔는지다.
국제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가 마주하는 것은 한 번의 무대가 아니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연주해야 하는 작품과 음악적 요구가 달라지고,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해석을 관객과 심사위원에게 전달해야 한다. 기교만으로는 여러 무대를 견디기 어렵다.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과 소리를 구성하는 방식이 함께 필요하다.
이정우는 온라인 예선을 거쳐 본선 50명 가운데 한 명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후 12명이 진출한 2라운드와 6명이 오른 준결승을 통과해 최종 3인이 겨루는 결선에 진출했다. 한 번의 인상적인 연주보다 여러 차례 무대에서 일정한 음악적 완성도를 유지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결선에서 그가 선택한 작품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 Op.21이었다. 19일(현지시간) 부쿠레슈티 루마니아 아테네움에서 지휘자 다니엘라 칸딜라리가 이끄는 제오르제 에네스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화려한 기교가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그 매력을 손가락의 속도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피아노가 노래하듯 선율을 끌어가면서도 섬세한 음색의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강한 부분과 여린 부분 사이의 대비 역시 작품 전체의 흐름 속에서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협주곡이라는 장르는 피아니스트 혼자만의 음악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음향을 듣고 자신의 소리를 조절하면서도 피아노의 선율을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 때로는 앞에 나서야 하고, 때로는 오케스트라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독주 무대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음악적 판단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점에서 결선에서 쇼팽 협주곡을 택한 것은 이정우가 피아노의 기교뿐 아니라 앙상블 안에서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경험을 쌓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18세라는 나이와 관계없이 결선 무대에서는 하나의 완성된 협주곡을 이끌어야 하는 연주자로 서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제오르제 에네스쿠의 음악에 대한 평가다. ‘Radu Lupu Prize’가 에네스쿠 작품의 뛰어난 해석에 주어졌다는 점은 이정우의 연주가 단순히 익숙한 레퍼토리를 소화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네스쿠는 루마니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서유럽 클래식 음악의 전통과 루마니아의 민속적 음악 요소를 자신의 작품에 녹여낸 인물이다. 그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악보의 음표를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만큼 작품이 가진 리듬과 선율의 개성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피아니스트의 해석이 중요해진다. 같은 음표라도 어디에 무게를 두고 어떤 호흡으로 연결하느냐에 따라 음악의 인상이 달라진다. 익숙한 쇼팽과 상대적으로 덜 익숙할 수 있는 에네스쿠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음악적 감각을 보여줬다는 점은 이번 대회를 바라보는 중요한 단서다.
지정곡 역시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이미 충분히 연습해온 작품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듬는 것과 새로운 작품을 빠르게 파악해 무대에 올리는 것은 다른 능력을 요구한다. 지정곡 최고 연주상은 이정우가 익숙한 레퍼토리 바깥에서도 음악적 판단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청중상 역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클래식 연주에서 악보에 대한 이해와 정확한 연주는 출발점에 가깝다. 결국 연주자가 만들어낸 음악이 객석에 어떻게 전달되는지가 중요하다. 심사위원의 평가와 별개로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은 이번 무대가 연주자와 청중 사이의 접점을 만들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정우가 이 같은 음악적 경험을 쌓아온 배경에는 국내외 교육과 무대 경험이 있다. 국내에서는 신수정 교수를 사사했고 금호영재로 활동했다. 17세에는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음악원(NEC)에 입학해 현재 백혜선 교수를 사사하고 있다.
2024년 독일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 우승을 비롯해 신한음악상과 이화경향음악콩쿠르 등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현대차 정몽구재단 장학생으로 선정되는 등 연주 활동을 이어왔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경력의 숫자가 아니라 음악적 환경의 변화다. 국내 무대에서 시작해 국제 청소년 콩쿠르를 경험하고, 이제는 세계 각국의 젊은 연주자들과 경쟁하는 국제 콩쿠르의 결선까지 올라왔다. 연주자로서 마주하는 음악의 폭도 그만큼 넓어지고 있다.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는 그런 변화가 한 무대에 압축된 자리였다. 20회를 맞은 이번 대회에서 이정우는 쇼팽 협주곡을 통해 낭만주의 레퍼토리를 보여주는 동시에 에네스쿠 작품과 지정곡을 통해 다른 음악적 요구에도 대응해야 했다.
18세라는 나이는 그래서 이번 기록을 특별하게 만드는 숫자이면서 동시에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숫자다. 이미 한 차례 국제 콩쿠르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지만, 연주자의 음악적 색깔은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나느냐에 따라 계속 달라질 수 있다.
쇼팽을 비롯한 낭만주의 레퍼토리에서 자신의 강점을 더욱 발전시킬 수도 있고, 에네스쿠처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을 통해 레퍼토리를 넓힐 수도 있다. 현대음악이나 새로운 위촉 작품에 도전하면서 동시대 음악에 대한 관심을 확장하는 길도 열려 있다.
결국 이번 대회의 의미는 우승이라는 결과에만 머물지 않는다. 여러 라운드를 거치며 다양한 음악적 요구를 경험했고, 결선에서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다. 동시에 작곡가의 음악을 해석하는 능력과 새로운 작품에 대응하는 유연성도 보여줬다.
이제 남은 것은 콩쿠르 이후의 음악이다. 한 번의 무대에서 얻은 기록을 넘어 어떤 레퍼토리를 선택하고, 그 작품에서 어떤 소리를 만들어낼지에 따라 이정우의 음악적 색깔은 더욱 구체화될 것이다.
18세의 이정우에게 이번 우승은 도착점이라기보다 하나의 이정표에 가깝다.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한 만큼, 앞으로는 ‘콩쿠르 우승자’라는 이름보다 어떤 음악을 들려주는 피아니스트인지로 기억되는 과정이 시작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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