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 연속성: "내 연금, 끝까지 나를 따라오라"[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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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 연속성: "내 연금, 끝까지 나를 따라오라"[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16

이데일리 2026-09-19 08:20:0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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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퇴사 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IRP 계좌 사본을 보내주세요.”

한국의 직장인이라면 낯설지 않은 퇴사 절차입니다. 회사를 떠날 때마다 우리는 은행에 가서 IRP 계좌를 새로 만들고, 퇴직금이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계좌를 해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 직장에 가면 또다시 새로운 퇴직연금 계좌가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연금 계좌는 ‘사람’을 따라오지 않고 ‘회사’를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회사가 바뀔 때마다 내 연금의 역사는 끊어지고, 다시 0원부터 시작하는 도돌이표를 밟게 됩니다.

그런데 연금 선진국이라 불리는 호주도 불과 몇 년 전까지 비슷한 문제를 앓고 있었습니다. 다만 병의 모양은 달랐습니다. 한국에서는 계좌가 조각난 뒤 쉽게 깨지는 쪽으로 흘렀고, 호주에서는 여러 계좌가 방치되며 수수료와 보험료가 새는 쪽으로 흘렀습니다. 그 씨앗은 역설적이게도 호주 슈퍼애뉴에이션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에 숨어 있었습니다.

1983년 캔버라의 실수 — “사람이 아니라 회사를 보았다”

앞 장에서 살펴본 1983년 호주의 ‘노사정 대타협’을 떠올려 봅시다. “기업이 임금 인상분의 일부를 연금으로 넣어준다”는 합의는 호주를 연금 강국으로 만든 결정적 장치였습니다. 하지만 그 설계에는 한 가지 빈틈이 있었습니다. 연금 적립이 사람의 생애 계좌가 아니라, 고용관계와 기업의 선택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A사에 입사하면 A사가 정한 기금, B사로 이직하면 B사가 정한 기금에 들어가는 식이었습니다. 평생 여러 번 이직하면, 내 이름으로 된 연금 계좌도 여러 개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주의 비극(뱀파이어) vs 한국의 비극(리셋)

시간이 흐르자 호주 전역에는 이른바 ‘뱀파이어 계좌(Vampire Accounts)’ 문제가 커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연금 계좌를 갖게 되었고, 흩어진 계좌들에서는 매달 관리 수수료와 보험료가 빠져나갔습니다. 계좌가 하나로 모여 있었다면 투자로 불어났을 돈이, 작은 잔액들 속에서 비용으로 새어 나간 것입니다.

한국의 문제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뱀파이어 계좌’보다 ‘리셋(Reset)’에 가깝습니다. 호주에서는 계좌가 흩어진 채 남아 비용을 갉아먹었다면, 한국에서는 계좌가 조각나는 순간 “어차피 푼돈인데 그냥 쓰자”는 유혹이 커집니다. 자산이 한 계좌에 뭉쳐 있으면 깨기가 어렵지만, 이직 때마다 작은 덩어리로 떨어져 나오면 쉽게 손을 대게 됩니다. 증상은 다르지만 뿌리는 닮아 있습니다. 계좌가 사람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설계입니다.

물론 계좌가 조각나는 구체적인 경로는 다릅니다. 호주는 고용주가 정한 기금으로 돈이 들어가던 구조 때문에 이직할 때마다 계좌가 늘어났습니다. 한국은 조금 다른 길을 거칩니다. 앞서 살펴봤듯, 한국 퇴직연금은 회사 명의 계좌 안에 근로자별 ‘가상 계좌’를 두는 기업연금 구조로 설계됐습니다. 이직하면 그 돈이 개인 IRP로 옮겨가는데, 이때 퇴직소득세 계산에 필요한 재직기간과 세액 정보를 계속 이어 붙여야 합니다. 이 처리가 번거로우니, 현실에서는 기존 계좌를 자연스럽게 이어가기보다 새 IRP를 열어 처리하는 방식이 반복되기 쉽습니다. 경로는 달라도 도착점은 같습니다. 계좌가 사람을 따라가지 못하면, 그 끝은 방치든 해지든 노후 자산의 손실입니다.

2021년의 개혁 — “계좌를 사람에게 붙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주 정부는 2021년 ‘스테이플링(Stapling, 이직하더라도 기존 연금 계좌가 스테이플러로 찍듯 사람을 따라 자동으로 연결되는 제도)’을 도입했습니다. 말 그대로 연금 계좌를 사람에게 스테이플러로 찍어 붙이듯 연결해 두자는 발상입니다. 근로자가 새 직장에 들어가더라도, 특별히 다른 기금을 선택하지 않으면 기존 계좌가 그 사람을 따라가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수많은 기업과 수많은 금융기관이 있는데, 도대체 누가 “이 사람에게 이미 붙어 있는 계좌는 이것이다”라고 확인해 줄 수 있을까요? 개별 금융회사는 어렵습니다. 자기 고객이 아닌 계좌 정보를 알 수 없고, 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기관들이 공통의 계좌 허브가 되기도 어렵습니다. 호주의 해법은 ATO(호주 국세청, Australian Taxation Office)였습니다. 근로자가 새 직장에서 기금을 직접 선택하지 않으면, 고용주는 ATO 전산망을 통해 그 사람의 기존 연결 계좌(stapled fund)를 조회합니다. ATO가 “이 직원에게 이미 연결된 기금은 A기금입니다”라고 알려주면, 기업은 그곳으로 기여금을 보내면 됩니다. 계좌의 연속성은 좋은 구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전체 계좌 정보를 확인하고 연결해 주는 공적 허브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한국의 현실 — 은행에게만 맡겨둔 ‘방치된 계좌’

이제 한국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여전히 이직할 때마다 개인이 직접 IRP 사본을 떼서 회사에 제출해야 합니다. 은행 창구에서는 새 계좌를 만들고, 퇴직금이 들어온 뒤 해지 여부를 묻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금융기관이 악해서라기보다, 현재 구조에서는 계좌를 오래 이어 붙이는 일이 누구의 분명한 책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좌가 사람을 따라가게 만드는 공적 허브도 약하고, 기존 계좌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강한 기본값도 없습니다.

‘한국형 스테이플링’에는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

한국형 스테이플링이 성공하려면, 단순히 “계좌를 합치세요”라는 캠페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호주의 ATO처럼, 근로복지공단이나 국세청 같은 공적 기관이 계좌 정보의 허브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근로자가 이직할 때마다 회사가 이 허브를 통해 “이 사람에게 이어져야 할 IRP 계좌는 여기구나”라고 확인하고, 퇴직급여와 관련 세금 정보를 함께 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찮아서 새로 만들고, 들어오면 해지한다”는 흐름이 끊어집니다. 내 연금이 나를 따라오는 진정한 포터빌리티(Portability)는 계좌번호 하나가 아니라 돈과 세제 정보와 운용 이력이 함께 이어질 때 완성됩니다. 이 컨트롤 타워를 실제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는 다음에 구체적인 로드맵으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내 연금은 회사가 아니라, 나를 따라와야 한다.” 이 명제가 실현될 때, 비로소 우리의 퇴직연금도 조각난 푼돈이 아닌 거대한 노후 자산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계좌가 이어진 뒤에도 남는 또 하나의 문제를 다룹니다. 사람들은 좋은 제도가 있어도 스스로 가입하고, 서류를 내고, 선택을 끝까지 마치는 데 자주 실패합니다. 영국은 이 인간의 관성을 거꾸로 이용했습니다. 행동경제학이 만들어낸 제도적 장치, ‘자동 가입’의 비밀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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